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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몰락과 현학>
처음에는 무역인들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종교였다. 당시 불교는 이민족의 문화가 다른 특이한 풍습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후한 말(삼국지)가 시작되면 유교의 지배 이념의 기능이 상실하게 된다. 이 틈에 불교가 확대하게 된다. 유교의 붕괴는 문확과 예술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이후 조조의 위나라가 낙양을 수도로 하는 사마씨의 진나라로 계승하게 되는데 이러한 위진시대에 유행한 것이 현학이다. 현학(위진시대 학풍)은 오묘하고 심오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주요 텍스트와 관련해서 삼현학이라도 하는데 노자, 장자, 주역을 의미한다. 학문의 중심이 유교에서 도가적인 계통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를 신도가라고 한다. 신도가는 귀족적인 문화 정서였기 떄문에 정치와 사회질서를 아우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 문화가 불교에 비해서 약했다는 뜻이고 중국인들은 이후 불교에 매료되는 이유가 된다. 현학의 유행은 불교가 유행하는 과도기적인 측면에서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격의 불교라고 하여 도가식의 단어를 빌려서 불교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해가 부족하면 불교에서도 도가를 유사한 측면으로 이해하곤 했다. 이러한 이해의 문제는 불교가 점차 정착되고 안정되면서 양자의 차이가 분명해지며 해소가 된다. 즉, 중국 불교가 성행하게 되는것에는 유교의 몰락과 현학이라는 과도기적 가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 정치는 유교, 철학은 도가적이였으나 불교가 더 철학적이여서 도가를 앞설 수 있었다
<5호 16국 시대> 여산 혜원스님(사문불경왕자론 제정분리) - 정토종 시조
현학의 귀족주의는 한족들에게 험한일을 꺼리게 되는 문화를 만들게 된다. 이때 유목민들이 기후변화 따른 가뭄으로 남하하게 되는데 이때 한족들은 유목민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하면서 이를 해결한다. 유목민 수가 많아지자 진나라의 내분은 팔왕의 난을 가져오고 결국 유목민의 봉기로 인해 진나라는 붕괴된다. 이따 사마씨 일족이 양자강 남쪽으로 도망가 난징을 수도로 개창하게 되는 것이 바로 동진이 된다. 동진 이전을 서진이라고 하다. 서진의 붕괴는 강북에 오호인 선비, 흉노, 갈, 저 강의 5유목민족등레에 의한 16국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것이 소위 5호 16국이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유목과 농경의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강북은 유목민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불교는 유목 세력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들의 왕조가 개창되자 자연스럽게 불교가 지배 이념이 된다. 당시에는 지배 이념이 부재했고, 소수의 유목민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구조에서 한족을 단합시킬 수 있는 한족적인 문화대신 불교를 선택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판단이다. 지배이념이 불교가 되자 한족이 반발이 있었지만 "이방의 신에 대한 것이므로 한족과 맞지 않는다." 이때 석호왕은 나는 이방인이므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불교를 더욱 진흥하게 된다. 이 기록은 당시 문화적인 충돌과 이민족 지배의 특수성을 잘 나타내 주는 점이다. 불교는 유교의 몰락과 현향의 유행 속에서 이민족의 남하로 인한 왕조 개창을 통해 강북에서 유행하게 된다.
* 농경민들이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게 되자 현실의 벽을 느끼게 된다. 이로써 이상주의에 빠진다.
방어기제로 전체론을 사용하게 되며, 불교의 반야사상과 불성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 반야사상: 덧없다. 꿈이다. 현실이 헛된것이다(잘못 받아 들임)
- 불성사상: 나는 온전한데 환경이 좋지 않아서 이런 것이다.
<강남 불교와 청담>
강남 문화는 손권의 오나라에서 시작되어 동진과 이후 송제양진에 이르게 되는데, 이들 왕조는 모두 현재의 난징에 수도를 둔다. 이를 6조시대라고 한다. 육조시대의 학풍은 탈속적인 청담인데, 이것의 대표가 죽림칠현이다. 지금의 힘으로는 유목민을 어찌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현실을 부정하는 탈속적인 취향을 유행하게 된다. 이때 술과 한삭산이라는 마약에 취해서 현실도피하게 되는데 이것이 강남 귀족 문화의 특징이 된다. 강남은 수량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는 윤택했다. 이것은 고개지나 왕희지 도연명 등의 예술 문화가 발전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강남의 귀족주의와 현실도피 예술정신은 불교의 종교적인 관점과 통하는 면이 있다. 그 때문에 강남에도 불교의 바람이 분다. 후일 선종의 화두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기풍의 정신적 기원이 바로 청담과 연관된다. 청담은 강남 불교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이다.
또한 강남에는 강승회 라는 역경승이 있었다. 강승회는 오나라 손권에게 찾아가 불교를 전파하게 된다. 그 때의 손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리를 나타나게 하였다. 강승회가 3주 동안 기도를 하자 사리가 떨어졌으며, 그 사리는 빛이 나고, 불에 타지 않고 깨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손권이 진짜 망치로 내려쳤더니 망치가 훼손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로써 오나라 손권가 불교를 지지하게 됨으로써 건초사라는 절을 짓게 된다. 강승회 보다 지겸이라는 승려가 있었으니, 아마 강승회를 위한 찬양이 아닐까 싶다.
* 사리는 지구가 없어져도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나중에 마니주라는 보석이 된다.
* 우리 나라 기록 있는 사리는 금강산 건봉사 치사리(동국여지승람), 통도사(정골사리), 월정사 중대 (뇌사리)
* 우리나라 3대 성산(금강산: 법기보살, 오대산: 문수보살, 연천 보개산 석대암: 지장보살)
* 뇌-치아가 유명하며 그 이유는 사라지지 않는 단단한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세계 3대 사리는 인도 피크라흐와(영국식민지때 발견),
미얀마 (상인들이 머리카락을 얻은 것) 까바예파고다, 법문사(황실, 아소카왕때 사리)
<강남 : 여산의 극락왕생 결사, 사문불경왕자론>
강남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도안의 제자인 혜원(334~416)이다. 혜원은 21세에 도안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후 양양이 함락되자 강남의 여산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여산은 강서성 구강부에 있는 명산으로 중국에 "무릉도원이 있다면 여산이 그곳일 것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려한 산이다. 고승전 권6에 따르면, 혜원은 그 지역 지방관의 후원으로 386년 여산에 동림사를 창건하게 된다. 이후 30년간 산을 떠나지 않았는데, 손님을 배웅할 때에도 입구의 호계까지만 나갔다고 한다. 혜원은 중국 정토신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혜원은 402년 동림사에 123명의 문도와 함께 염불을 하며 극락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는 결사, 즉 백련결사를 단행한다. 이때 참여한 인물 가운데에는 도생과 같은 승려 외에도 송나라의 화가이자 화론인 화산수서의 찬술가인 종병이나 재상 유유민과 같은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남조라는 혼탁한 전란의 시대 상황속에서 극락이라는 이상 세계를 꿈꿨던 것이다.
불도징은 외국 승려, 도안은 못생기고 평민 출신이였지만 여산은 사족출신으로 강남 지역에서 귀족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산 혜원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사상을 설명하는 격의불교를 펼치면서 강남일대에 귀족들에게 불교를 전파하였다. 여산을 중신으로 한 혜원의 교단은 여산 교단이라고 하는데, 여산교단은 계울은 엄격히 지킨 것으로 유명했다. 혜원의 입적 기록을 보면, 제자들이 기력이 너무 쇠한 혜원에게 꿀물이라도 드시라고 하자 혜원은 오후에 꿀물을 먹을 수 있는지를 율장에서 찾아보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통해서 혜원은 오후 불식을 하였던 엄격주의자였으며, 당시는 꿀물을 오후에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조차도 불분명할 정도로 율장이 완비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율에 엄격했던 혜원가 대비되는 인물이 강북의 구마라집이다.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붙잡혀서 수모를 당하는 17년 중에는 여광이 강제로 술을 먹여서 구라마집이 파계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후 구마라집은 언제나 부끄러워하면서 역경장에게 경전을 설할 때마다 청중에게 "진흙에서 연꽃이 피는데, 진흙은 보지 말고 연꽃만 보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내가 법문 한 것이 거짓말이 없다면 내 혀는 불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진짜로 혀는 불타지 않아서 그것을 장안 초당사에 부도탑을 세웠다. 406년에 장안으로 온 인도의 승려 불타발타라(359-429)는 계율 문제로 구마라집을 비판하면서 구마라집의 제자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411년 강남혜원의 여산교단으로 가게 된다. 이후 412년부터 지금의 남경 도량사에서 화엄경과 마하승기율등 13부 215권을 번역한다. 혜원의 계율주의가 불타발타라를 강남으로 오도록 인도한 것이다. 불타발타라는 이후 법현스님과 함께 마하승가율과 화엄경을 번역하였다.
<강남 여산: 사문불경왕자론>
혜원의 엄격주의와 의기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 사문불경왕자론이다. 이 책은 출가한 승려는 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담은 일종의 논술서이다. 동진의 제3대 군주 성제 때인 340년, 당시 재상이던 유빙이 승려도 군주에게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당시 반대론에 막혀 관철되지 못하였다가, 안제 때인 403년 태위 환현에 의해서 다시금 불거지게 된다. 이때 환현의 주장에 대새 4차례 걸쳐 논의를 전개하여 무력화 시킨 사람이 혜원이다. 이때 있었던 4차례의 논의를 보완해서 묶은 것이 바로 사문불경와자론이다.
승려는 군주에게서 독립되어 있다는 관점은 제정일치의 문화 배경을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주장이다. 그럼에도 혜원의 주장이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강남의 문화 배경에서 전개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후 비슷한 문제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산출된 강북불교의 행태와는 다른 모습이다. 특히 혜원의 여산교단은 군벌들끼리 충돌하는 전란과정에서도 군벌들 간에 서로 범하지 않는 성역으로 규정해 놓았을 정도로 당시 큰 존경을 받았다. 이런 점을 본다면 구마라집이 편지에서 혜원을 동방의 호법보살이라고 칭한 것은 과한 표현이 아니라고 하겠다.
<강북: 북위의 등장과 강북불교의 새로운 조짐>
중국의 5호 16국 시대가 마감하면서 강북의 패가자 된 것은 선비족의 척발부가 건국한 북위(386-534)였다. 북위는 강북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와 마찰을 빚게 된다. 그 이전의 강북불교는 5호 16국 시대의 분열되어 있던 여러 왕조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이들 왕조들에게는 자체 존립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불교의 지지를 얻어야 할 필연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북위는 강북의 단일왕조이며, 이는 불교에 대한 태도가 이전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위의 태조인 도무제는 396년 승려 법과를 동인통이라는 직책에 임명한다. 도인통이랑 도인의 총괄자라는 의미로 승려를 통솔하고 관리하는 직책이다. 도인통에서 칭하는 도인이란 곧 승려로 이후에는 사문통으로 명칭이 변경된다. 사문통이란 전체 사문의 통솔자라는 의미이다. 법과가 도인통으로 있었던 기간은 396년~ 398년까지 인데 위서 권114 석노지에는 이 기간 주에 법과가 했다는 놀라운 말이 기록되어 있다. "태조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이니, 황제는 곧 현재의 붓다이다. 그러므로 사문은 마땅이 예를 다하여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 밖에도 "사람들에게 도를 넓히는 자는 군주이다. 나는 황제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붓다에게 절을 올리는 것이다."라는 내용도 있다. 이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강남에서는 혜원이 사문불경완자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대조적인 일이다. 강북의 불교는 강남의 주체적인 교단 운영을 포기하고 정권에 예속되어 보호 받는 안전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중국불교는 결국 당나라를 거쳐 송나라에 이르면 완전히 국가적인 예속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명나라 때에 이르면 '금생에 출가하는 것은 다음 생의 유교의 고나리가 되기 위해서 공덕을 짓기 위함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아다닐 정도가 된다. 즉 북방불교가 주된 흐름이 되면서 중국 불교는 철저히 정권에 예속되는 것이다.
<북조 : 태무제의 불교 말살과 중국 불교의 교훈>
법과가 취한 '정치 권력 속의 안정'이라는 태도는 제2대 군주인 태종까지는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강북 통일이 완수하는 제 3대 군주 태무제가 되면서 전혀 다른 결과를 빚게 된다. 바로 중국불교 최초의 폐불 사건이다. 폐불이란 국가권력에 의해서 불교가 배척, 탄압받는 것으로, 중국불교에는 태무제 때를 시작으로 총 4차례에 걸쳐 폐불 사건이 일어난다. 이 4차례의 폐불을 가리켜 산무일종의 법난이라고 한다. 삼무일종일나 시호가 무자가 들어있는 3명의 군주와 종자가 든 한명이 군주를 가르킨다. 구체적으론는 북위 태부제와 폐불(446-452), 북주 무제의 폐불(574~579), 당뭄종의 폐불(842-846), 후주 세종의 폐불(955~958)을 의미한다.
3대 태무제 때에 폐불은 오두미도를 개량하여 신천사도를 개창한 도사 구겸지(365~448)와 유교 재상이었던 최호의 건의에 의한 것이었다. 태무제는 444년 스스로를 도교황제로 칭하면서 도교를 국교화한다. 이후 최호의 주청에 따라 447년 폐불이 단행되는데, 그 방법은 모든 사찰과 불상 및 불화를 파괴하고 승려들은 가리지 말고 묻고 죽이는 것이다. 그 잔인함 때문에 구겸지와 태자까지도 폐불을 반대했다고 한다. 태무제 때의 폐불은 황제가 도교를 신봉했기 떄문에 일어났다. 즉 종교의 차이에 따른 무자비한 탄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는 북위 내부의 요인도 있었다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던 북위는 한족 문화를 수용하면서 점차 한화되고 있었는데 선비족 중에 이를 비판하는 세력이 있었다. 이에 한족이었던 최호는 외래문화인 불교를 한화를 반대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해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태무제의 폐불에는 황제의 도교신본이라는 종교적 측면과 함께, 한족과 선비족의 갈등이라는 민족적인 측면이 이중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태부제의 폐불은 448년 구겸지가 사망하고, 450년 최호가 탁발씨의 황족 조상을 비판하는 내용이 표면화되어 최호의 일족 128명이 주살되는 것을 통해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태무제 역시 452년 환관인 종회에게 피살되면서 폐불은 끝이 난다.
태무제를 이은 4대 문성제(재위 452~465)는 즉위 즉시 폐불을 중지시키고 국가적인 지원하에 불교를 믿는 쪽으로 정책을 변경한다. 그러나 정치 권력에 의한 잔혹한 참회는 중국 불교에 엄청난 충격을 주면서 정치권력과 반목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각인하게 된다. 7대 효문제는 한족과 융합하려는 정책(창씨개명등)을 사용하게 되면서 유목민으로써의 정신을 잃게 된다. 이후 불교의 세력이 넓혀진것으로 보아진다. 그 이유는 북위 말기에 지어진 낙양가람기(6세기 중엽에 지어진 책 과거의 화려했던 사찰을 회상하며 지은 글)에 의하면 147m 영녕사 목탑이 있었으며, 5만 4천개의 풍경이 달려 있어 10리 밖에서도 소리가 들리고, 100리 밖에서도 탑이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담요의 운강석물 개착과 강북 불교의 자세>
3대 태무제의 폐불 이후 문성제의 불교지원은 강북의 불교 교단이 국가 구조에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북의 불교 교단 체제가 국가 조직의 관리하에 임명되는 별정직 관료제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시기의 중요한 인물이 문성제의 집권 후반기인 460~464년 사이에 사문통이 되는 담요였다. 위서 권 114 석노지에 따르면 담요는 460년 수도인 평성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운강에 제5대 문성제를 포함하는 북위의 다섯 황제들을 불상으로 재현하여 석가불, 미륵불, 아미타불, 약사불, 비로자나불의 오대불을 조성하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현대의 대동에 있는 운강석굴의 시작으로 이때 만들어진 오대불을 모신 석굴을 담요오굴이라고 한다. 이는 담요가 불교와 정권의 고나계를 어떻게 설정했는지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지이다. 담요오굴은 현재 운강성굴의 제16~20굴에 해당한다. 석굴에 모셔진 본존불의 크기는 제16굴의 입상이 13.5미터, 제17굴의 의자에 걸터 앉은 교각의 미륵상이 16.25미터, 제18굴의 입상이 16.38미터, 제19굴의 좌불이 16.48미터, 제20굴의 좌불이 13.46미터가 된다. 현재 불상이 뚜렷한 명칭이나 다섯 황제의 연결은 분명하지 않지만 담요가 거대한 불상을 만듦으로서 법과의 황제는 현세의 붓다라는 주장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운강석굴은 귀족들에 의해 개착이 가속화되는데, 현재 약 1Km에 걸쳐 있는 252개의 석굴에서 5만1천여기 불상이 확인되고 있다. 또 이러한 운강석굴의 개착은 이후 북위의 7대 군주인 효문제가 493년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착한 용문석굴로 연결된다. 용문석굴의 개착은 이후 당나라로 이어지면서 현재 약2300개의 석굴과 14만2천여 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담요의 방식은 북위 떄 불교 세력이 확대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477년의 불교 조사에서 북위의 수도인 평성에 100곳의 사찰과 2천명의 승려가 존재했으며, 전국적으로는 6,478곳의 사찰과 77,258명의 승려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승담의 국가예속은 불교의 확대와는 무관하게 더욱 강화되었다고 하겠다.
<북조의 흐름과 불교>
남북조 시대의 북조는 북위(386~534)가 취한 과도한 한화 정책 때문에 선비족의 불만이 폭팔하면서 523년 6진의 난이 발발하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북위를 계승한다는 동위(534~550)와 서위(535-556)이 들어섰지만, 동위와 서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북제(550~577)과 북주(577-581)로 바뀌게 된다.
북주의 3대 황제인 무제는 560년 황제에 올랐으나, 처음에는 우문호의 섭정기를 거친다. 572년 우문호를 제거하고 친정 체제를 확립한 무제는 당시 거대해진 불교 교단을 위험하게 여리고 있었다. 광홍명집 권8에 당시 " 승려가 천하를 얻는다."는 말이 떠돌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러한 말은 무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무제는 북제를 무너트리고 북조를 통일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위원숭과 도사 장빈에 의해서 부추겨지면서 결국 574년에 폐불 조치가 단행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떄는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 역시 탄압에 포함되었다. 즉 무제의 폐불은 거대해진 불교세력을 제거하고 이를 국가로 환원하자는 취지에서 행해진 것이다. 실제로 무제는 조세와 노력력의 가치를 고려하여 승려는 죽이지 않고 환속시켰는데, 당시 환속한 승려가 2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무제는 불교의 자본을 통해서 재원을 확보하고 마침내 577년 북제를 정벌하게 된다. 광홍명집 권10에는 무제가 "조세는 증가하고 병사는 늘어나 북제를 평정했다."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있다. 이후 복속된 북제 지역에서도 역시 폐불이 단행된다. 역대삼보기권12에 때르면 이때 4만여 개의 사찰이 귀족 저택으로 변하고 300만 명의 승려가 환속했다고 한다. 300만이라는 숫자는 과장이겠지만 이 기록을 통해서 당시 북주보다 북제 지역이 더 불교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제의 폐불은 478년 무제가 악성 종기로 사망하면서 반저을 맞게 된다. 이후 불교는 선제와 정제 대를 거치며 점차 화복하지만, 581년 외척인 수 문제 양견이 정권을 장악, 양위를 받으면서 북주는 사라지고 수나라가 건국된다.
<남조의 흐름과 불교>
강남문화의 가장 큰 번영은 양나라(502~557)에 이루어진다. 양나라는 제나라(479~502)의 마지막 군주인 화제의 양위를 받은 소연이 세운 것으로, 이 소연이라는 인물이 곧 양무제이다. 양무제는 개국 군주인 동시에 재위 기간이 무려 48년에 이른다. 양나라가 557년에 멸망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양나라는 거의 무제 혼자만의 왕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양무제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가장 불교적인 군주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불교 역시 크게 발전한다. 무제는 동태사를 창건하고, 출가를 단행하는 등 보살황제, 불심천자의 길을 걷는다. 스스로 불경르 자유롭게 강의할 정도로 였고, 동아시아불교의 찬란한 무현유산인 수륙제가 무제의 의해서 시작되기도 한다.
아마 양무제는 덕의 정치의 표본으로 아소카왕을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덕으로 중국을 통일하려고 했으며, 전쟁의 참회의 수륙제, 불교 진흥과 여러번의 출가등 그리고 동위의 후경이 투항하며 귀순하여 불교의 동화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결국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서 양나라는 한나라가 되지만, 그의 신하들은 덕의 무제를 모시고 있다가 힘들어져 진나라를 세우게 되고.. ...
* 수륙제: 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 불교의식.
<북조와 남조에서 다뤄지는 달마대사 이야기 >
선종은 그 시원을 보라달마라는 인도 승려에게 두고 있다. 보리달마 생애에 대한 기록이 북조와 남조에서 다뤄지게 되는게 그 내용이 상이하다. 보리달마라는 이름에서 보리는 깨달음을 의미하고, 달바는 진리라는 뜻을 가졌다. 즉 진리를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달마의 기록 중 547년 양현지가 지은 낙양가람기에서는 북위 시대 파사국, 페르시아에서 온 보리달마가 낙양의 최대 사찰인 영녕사와 목탑을 보고는 ' 이 사찰의 정교하고 빼어난 장엄함이 세계안에 다시 없을 것'이라고 감탄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 후의 자료로는 달마의 저술로 유력시 되는 이입사행론과 담림의 서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달마를 남인도 출신이라고 하였다. 후대 경덕전등록 등의 선종 문종에서는 보리달마의 출신이 남인도 향지국 또는 향지왕의 3째 아들로 정형화된다. 즉 달마의 출신지가 완전히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리달마에 대한 이야기는 이러하다. 남인도의 3째 왕자로 어린 나이에 출가한 달마는 인도의 제27대 조사인 반야다라에게 선을 배운다. 이후 중국으로 가서 교화 할 것을 지시받은 보리달마는 배를 타고 양나라로 온다. 이때 양무제와 만나지만 인연이 맞지 않아 갈대를 꺽어타고 장강을 건너 숭산으로 들어가 9년 동안 달마동에서 면벽수행을 한다. 이때 혜가가 눈이 많이 오는 날 가르침을 구하자 신표를 보일 것을 요구하고, 혜가는 팔을 잘라 진리에 대한 강인한 의지를 천명한다. 혜가의 의지를 본 달마는 이후 혜가에게 붓다에서부터 상속된 가르침과 가사, 그리고 능가경 4권을 전한다. 그렇게 교화를 전개하던 달마는 그를 시샘하는 이들에 의해 독살당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가장해서 짚신을 한짝 들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로 돌아간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부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화가 사실시된 것일 뿐이다. 특히 달마가 붓다에서부터 이어져 온 28대 조사라는 조통설이나 양무제를 만났다는 것, 또 혜가가 팔을 자그로 붓다의 가사를 받았다는 내용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은 혜능이 입적한 이후 육조헌창운동을 전개한 신회, 혹은 신회계통에서 구체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달마가 북위와 숭산 지역에서 활동한 것과 혜가에게 가르침을 주구 구나발타라가 443년에 번역한 능가경을 전해주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 즉 달마의 일대기는 후대 선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설화의 못을 두텁게 입게 되었던 것이다.
*선종의 4대 종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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