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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교세를 확장하여 여러 지역으로 전파된다. 그 중에서 중국으로의 전파는 실크로드가 개천한 이후 활기를 띄게 된다. 지형적으로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히말라야 산맥이 있고, 두 지역을 왕래하기에는 중앙아시아를 거친 먼 우회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우회로가 실크로드이다.
*가장 험난한 길을 부드러운 비단의 이름을 붙였으며, 이동의 품목 중 비단보다는 도자기가 주요 교역품였다.
실크로드는 기존에 오아시스 사이에 존재하던 부분적인 교통로를 하나로 연결시킨 오아시스로드이다. 이런 교통로를 하나로 연결시키도록 한 인물이 장건이다. 장건은 한나라 제7대 황제인 무제때 쿠샨완조)월지)와 동맹을 맺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흉노족에게 붙잡히는 등 13년간 유랑하다가 기원전 126년에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유랑과정에서 장건이 파악한 중앙아이사와 관련된 많은 정보와 교역로들이 한 무제의 팽창정책과 맞물리면서 실크로드라는 개척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 권123 대완열전에서 서여각공, 서역으로 길을 뚫었다고 되어 있다.
<실크로드와 오아시스 국가가 불교에 남긴 흔적>
오늘날의 실크로드는 오아이스로, 초원로, 해로의 세가지 간선으로 이루어진 교역로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장건이 파악한 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로로, 고대의 교욕과 문명의 교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길이다. 불교의 중국 전파 역시 이 오아시스로를 따라서 이루어진다. 참고로 해상 실크로드는 항해술이 발전하눈 후에 완성되고, 이후 오아시스로의 쇠퇴로 이어진다. 오아시스로는 장안에서 출발해 무위, 장액, 주천, 돈환의 하서 4군까지는 동일하다. 이후 길은 천산산맥을 만나면서 선산산맥의 북과 남으로 우회하는 천산북로과 천산남로로 갈라지게 된다. 북쪽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를 연결한 길이고, 남쪽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경유하는 길이다. 이외로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은 서역남로라고 한다. 그래서 천산남로를 서역남로, 서역북로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갈라진 두 길은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파미르 고원 인근의 카슈가르에서 하나로 만나게 된다. 이 중 불교 전파와 중앙아시아불교와 관련된 중요한 길은 천산남로와 서역남로이다. 천산남로는 고혹, 쿠차와 키질등이 있고, 서역남로에는 호탄, 니야등이 있다. 실크로드가 지나가는 지역에는 60개 이상의 많은 오아시스 국가가 존재한다. 이는 불교가 중국으로 동점할 때 중앙아시아 문명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붓다를 음사한 말 불타와 불 중에서 붓다를 불타로 음사하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불로 줄이는 것은 납득하기 쉽지 않다. 이것은 붓다를 'but' 로 발음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표현법을 따른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붓다를 칭할때 불타보다 불이라는 표현이 더 일반적이라는 점을 보면 서역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승가를 승으로 음사하는 방식에서도 확인이 된다.
<서쪽으로 전파된 불교>
실크로드가 개척되기 전에는 인도의 주된 교역은 서쪽이였다.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으니깐 말이다. 사분율 권31 수계건도에는 붓다가 부다가야의 보리수아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7~14일 사이에 그곳을 지나던 제위와 파리라는 두 대상의 우두머리가 붓다께 공양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때 안전을 위한 호신물로 붓다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받게 된다. 이후 붓다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봉인한 불교 최초의 탑을 건립하게 되고 이것이 조발탑이 된다. 미얀마에서는 조발탑이 바로 양곤에 위치한 쉐다곤파고다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인도 당시에는 미얀마가 아니라 파키스탄이 교역로였다. 대당서역기에서도 발각국에서 제위, 파리가 건립한 조발탑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발흐에서 목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붓다 당시 불교는 인도의 대외교역로를 타고 인도 끝을 넘어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했다고 볼 수 있다.
<실크로드 서역남로의 호탄>
실크로드의 서역남로에 위치한 호탄은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은 곳이다. 그래서 이 나라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사천왕 중 하나이자 북방을 관장하는 비사문천왕을 숭배하며, 아소카 왕의 아들인 쿠날라가 건국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육완경 권 4에 따르면, 쿠날라는 아소카 왕의 뒤를 이를 태자였으나 계모의 책략때문에 눈을 잃고 버림을 받은 비운의 왕자이다. 그런데 현장의 자은전 권5에 의하면 호탄이 불교 국가가 되면서 쿠날라 완자는 호탄의 건국 시조로 변모하게 된다. 불교는 신 중심의 종교가 아니기 때문에 왕계의 신성함을 불교적인 성스러움과 연관해서 변증하는 경우가 나타나는데 쿠날라 왕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이와 같은 양상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구층탐에서 신라의 왕계가 인도사성의 왕족인 크샤트리아의 혈통이라는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 호탄에는 사막에서 서식하는 몽구스를 숭배하는 유퐁이 있었다. 이것이 비사문천왕 신왕과 결합되면서 비사문천왕의 도상에 쥐와 같은 형상이 드어가게 된다. 이와 같은 양상은 티베트와 중국 및 우리나라의 사천왕문에 묘사된 비사문천상의 일부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바미얀과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키질, 그리고 돈황>
바미얀은 실크로드의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 한 곳으로 지난 2001년 3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의해서 파괴된 바미얀 석불이 있었던 지역이다. 바미얀은 서쪽과 북쪽으로 실크로드가 지나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와 접하는 문명의 접점이다. 이곳에서 500년대 초 동서로 각각 38미터 55미터 크기로 조성된 바미얀 석불은 멀리에서 오는 대상들에게는 기원의 등대와 같았다. 바미얀 석불에 대한 최초의기록은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1 범연나국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미얀 석불 주변에는 많은 석굴군이 존재한다. 이러한 석굴사원 전통은 무더운 기후에서 흔티 나타나는 것으로 인도 남쪽의 오랑가바드 지역 석굴군에서 시작해서 실크로드를 타고 발전한다. 천산남로를 타고 중국으로 전파된 석굴사원의 전통은 키질의 천불동과 돈황의 천불동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천불동이란 불상을 모신 동굴의 숫자가 1000을 헤아릴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바이얀이나 키질, 돈황 같은 지역에서 석굴군이 발견된 것은 이들으 지역의 위치적 특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다. 바이얀은 인도에서 로마나 중국으로 가는 갈림길이였으며, 키질은 천산남로의 중간 휴식지, 돈황은 천산남로의 중간 휴식지이자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그래서 길을 떠나는 대상은 이곳에서 붓다의 가피를 기원하였으며 도착하는 이들에게는 무사히 여정을 마쳤다는 것에 감사하는 곳이였던 것이다.
[세계의 석굴이야기] 오랑가바드석굴 < 세계의 석굴 이야기 < 연재 < 기획연재 < 기사본문 - 불교신문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
불교가 중국에서 처음 알려진 것은 실크로드를 타고 들어온 상인에 의해서였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을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역사적인 기록이란 큰 사건이나 최고 신분과 관련된 내용으로 제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언제 전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불교와 관련된 기록은 여러번 발견된다. 그 중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 권123 대완전에서 한 무제 때 월지국과 동맹을 위해 파견된 장건이 중앙아이시를 떠도는 과정에서 인독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던 내용이다. 물론 인도에 대해 알았다는 것이 불교를 안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장건이 전한의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온 것이 기원전 126년이므로 불교를 알았을 가능성 역시 충분히 존재한다. 실제로 이후에 쓰인 후한서 권88 서역전과 진수의 위서 권 114 석논지 등에서는 장건의 인도 기록을 곧장 불교와 연결시키고는 있다. 또 사기 권 100 흉노열전등에는 기원전 121년 한무제가 장군 곽거병을 파견하여 흉노의 소왕인 휴도왕을 제압하고 유도왕이 숭배하던 금일을 입수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휴도왕의 휴도는 붓다, 혹은 불교에 대한 음사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휴도왕은 붓다 왕 불교왕이라는 이해도 가능한 것이다. 또한 금인이 중국에서 불상을 가르키는 말 중 하나라는 점을 보면 한무제가 입수한 금인이 불상이었다고 생각해 볼 여지도 존재한다. 물론 기원전 121년에는 불상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금인을 천신상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 한나라의 팽창이 중국과 인도를 연결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후한 명제의 감몽구법설>
일반적으로 중국의 불교 전래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는 기록이 후한서의 권88 서역전에 나오는 후한 명제의 감몽구법설이다. 67년 후한의 제 2대 황제인 명제가 꿈에 금인을 보았는데, 그 금인은 매우 장대하고 정수리에서 광명이 발하였다고 한다. 꿈에서 깬 명제가 이 내용을 신하들에게 말하자 신하들은 서방에서 붓다를 모신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신하들의 말을 들은 명제는 인도에 사신을 보내서 불교에 대해 묻게 하고 붓다의 형상을 그렿다고 한다. 이 내용을 보면 신하들은 이미 불교에 대해서 인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기록은 황실에 불교가 전해진 계기에 대한 것이지, 이때 불교가 전해졌다는 뜻이라고 할 수는 없다. 후한 명제 때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은 명제의 이복동생인 초왕 영에 대한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후한서 권 42 초왕영전에 따르면 초왕영은 41년에 왕이 되었으며, 65년에는 초왕이 황로(도교)와 부도(불교)를 믿는 것을 명제가 칭친하였다고 했다. 이 기록에는 초왕 영이 승려와 신도들을 공양했다는 내용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를 보면 명제 때에는 불교가 나름의 교단 조직을 확보하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서이기의 중국불교가 만든 허구와 실재>
불교의 중국전래와 관련해서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주서이기의 기록이다. 주서이기에는 붓다가 지금으로 부터 3천년 전 인물이며, 붓다 재세 당시 중국에서도 붓다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내용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주서이기에 따르면 붓다는 주나라 소왕 24년인 기원전 1030년 4월 8일에 탄생하여 주나라 목왕 52년인 기원전 949년 2월 15일에 입멸하였다고 한다.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소왕 24년 4월 8일 대지가 진동하고 오색 및이 황제를 상징하는 태미성을 꿰뚫어 서쪽을 청홍색으로 물들었다. 소왕이 이 일에 대해 천문과 역사를 관장하던 소유에게 묻자, 소유는 성인이 서방에 탄생한 징조이며, 천년이 지나면 중국으로 가르침을 전해질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또 목왕 52년 2월 15일에는 산천이 진동하여 서쪽에 열두줄의 흰 무지개가 나타나 남북으로 걸쳐져 사라지지 않았다. 목왕이 천문과 역사를 관장하던 호다에게 묻자, 서방의 성인이 입멸해서 애도의 기상이 나타난 것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서이기는 그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그 내용을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허구적 내용이 중국에서 나타나게 된 것은 다음의 2가지 이유 떄문이다.
1. 줄교와 중국이 관련된 역사가 오래되고, 붕국으로 불교가 전래할 수 밖에 없었던 당위성을 변증하기 위함이다. 불교는 후한시대 점차 세력을 넓혀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위진남북조는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사이에서는 불교 때문에 중국의 혼란기가 전개된 것이라는 비판이 잇었다. 불교에서는 이 주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중국인이 이상적인 시절이라고 생각하던 주나라 때 이미 붓다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 역시 정해진 일이었다는 주장이다.
2. 중국에 상고주의, 즉 역사가 오래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도교의 노자와 유교의 공자가 활동하던 시대보다 뭇다의 활동 연대를 훨씬 더 앞세워서, 이들보다 붓다가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주서이기 기록이 신빙성이 떨어짐에도 그 연대가 중요한 것은 최근까지도 동아시아에서는 이 기록을 기준으로 계산한 불기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기란 붓다의 입멸연도를 기준으로 하는 불교의 연도 표기법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불기는 1956년 11월 네팔의 수도인 카투만도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붓다의 입멸을 기원전 544년으로 본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온 동아시아의 불교 문헌에서도 불기를 주서이기 속 붓다의 입멸년인 기원전 949년을 기준으로 표기했다. 그러므로 동아시아의 과거 기록을 보기위해서는 주서이기 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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