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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불, 목건련의 입적과 교단의 공백>
붓다의 수제자는 사리불과 목건련이다. 이 두제자는 나란다사 인근 지역의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발지론권19에서는 두 제자를 특별히 존중해여 "쌍현"이라고 칭하고 있다. 목건련은 사리불에 필적하는 능력을 가진 제자는 아니었다. 목건련은 사리불의 친구이면서 그를 언제나 존경하였다. 잡아함 권 22, 23에서는 "붓다를 제외하고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사리불의 지혜에 필적할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로 사리불의 위상은 독보적이었다. 또한 회수경 권45에서도 붓다가 사리불에게 "장남"이라고 칭하는 부분도 있다. 이로 인하여 용수의 '대지도론 권2'에서도 사리불을 제2붓다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으며, 석가모니를 제외하고 붓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인물은 오로지 사리불 뿐이다.
사리불은 붓다의 깨달음과 중도주의를 잘 체득한 인물이다. 그러나 붓다보다 연배가 위었던 그는 붓다보다 먼저 입적하게 된다. 사리불의 입적 앞에 목건련도 입적하게 되는데 ,이는 불교 교단의 제자 그룹에서 공백이 발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잠아함 권2 '포살경'의 기록을 보면, 붓다는 2제자가 입적하고 얼마 지나지 않는 자리에서 '교단이 텅 빈 것 같다'라고 하며 깊은 애도의 감정을 나타낸다.
<불기는 붓다의 입적이 기준>
교단에는 이들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얼마 후 붓다 마저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안거를 끝으로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하게 된다. 붓다는 두 사리수 사이에 머리를 북으로 두고 오른쪽으로 누운 채 열반하였다고 한다. 이는 서쪽을 보고 입적한 뜻인데, 출가와 깨달음이 동쪽을 향해 이루어진것과 달리 반대의 상황인것이다. 이는 해가 동에서 올랐다가 서쪽으로 지는 것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결합한 것으로 보아진다. 불교에서는 육체가 존재하는 한 완전한 깨달음을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구현될 수 없다고 본다. 육체가 있음으로 깨달음에는 걸림이 있는데, 죽음으로 인하여 진정으로 완전한 깨달음이 성취되었다고 판단하다. 이것을 일체의 남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무여열반이라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불교에서는 붓다가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불기를 계산하게 되는것이다.
<마하가섭의 교단 주도>
붓다의 입적 후 엄격주의자였던 두타제일 마하가섭에게 교단의 주도권은 넘어간다. 현장의 대당서역기 권9에 따르면 붓다가 입적하고 20년 뒤에 계족산에서 최후의 선정에 드는것으로 되어 있으니, 아마 붓다보다 젊은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두타행은 12두타행법, 13두타행법, 16두타행법, 25두타행법이 있으나 이를 요약하면 제바달바의 5법과 유사하다.
12두타법 | 내 용 |
분소의 | 버려진 천으로 누더기만 입는다. |
삼의 | 수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의복만 사용한다. |
걸식 | 탁발에 의지해서만 음식을 섭취한다 |
일좌식 | 한 자리에서만 먹는다 |
일단식(절량식) | 하루에 한번 배고프지 않을 정도만 먹는다 |
중후불식장(불비시식) | 정오가 지나서는 물을 제외한 주스 등 일체의 음식을 섭치하지 않는다. |
아란야처 | 고요한 수행처에만 거처한다. |
재총간 | 무덤 사이에 거처한다. |
재수하 | 나무 아래에서 거처한다. |
재노지 | 지붕이 없는 노지에서만 거처한다. |
상좌 | 언제나 앉고 있고 밤에 눕지 않는다. |
수좌(수유초지이좌) | 방석이 아닌 풀 위에만 앉는다. |
마하가섭이 교단의 주도권을 가지게 된것은 사리불, 목건련처럼 왕사성 출신의 승려였기 때문에 왕사성 출신의 승려들이 그를 암묵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마가승기율 권32에서는 마하가섭이 붓다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1차 결집을 주도할 때, 중앙에 붓다의 자리를 꾸미고, 그 좌우로 사리불과 목건련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배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마하가섭이 사리불과 목건련의 지지 세력을 끌어 안고 불교 교단의 리더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엄격주의였던 마하가섭은 불교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지만, 불교 초기의 장점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붓다의 중도주의가 빛을 잃고 서서히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입멸 전에 아난에게 계울 가운데 불필요한 것은 없애거나 개변하라고 말하졌지만 마하가섭은 그 기준이 모호하기에 모든 계율을 무조건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한다. 현재까지에도 불교는 붓다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마하가섭의 주장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계율이란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또한 사회에서는 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에 시대나 문화 등 상황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그래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마하가섭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주의적 한계에 머문다는 비판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붓다의 장례를 주도한 마하가섭>
초기 불교의 승려들은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모범이 되는 붓다의 깨달음와 입멸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입멸과 관련된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을 중요시 하였기 때문에 붓다가 열반하기 전 3개월의 여정은 '대반열반경'을 비롯한 입멸 8종의 문헌을 통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붓다는 열반에 들기 3개월 전 바이샬리에서 자신의 입멸에 대해 고지하였다. 붓다가 열반에 들기전 관련 인물들이 쿠시나가르에 모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로 마하가섭은 붓다가 열반하고 입관한 후에야 500인의 무리와 함께 도착하였다. 그리고 이 사실은 붓다의 임종을 보지 못한 마하가섭이 교단의 계승자가 되어 장례를 주관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선종에서 말하는 삼처전심 중의 하나인 곽시쌍부이다. 곽시쌍부란 붓다가 입관된 상태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마하가섭의 예경을 받아준 일을 가르키는 말로, 늦게 도착한 마하가섭의 정통선을 붓다가 인정해 주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십송율 권60에는 붓다가 발을 내밀어 준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이 관을 열고 염한 것을 풀어 준 것으로 되어 있어 관점은 같지만 전승되는 내용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리를 모시고 불탑을 건립하는 재가인>
붓다의 장례와 관련된 일체의 절차는 붓다가 생존해 있을 때 시자인 아난이 질문한 바로 이뤄진다. 여기서에 흥미로운 점은 붓다가 자신의 사리 수습과 탑의 건립을 재가인들의 몫으로 하여, 승단과는 별도의 일이라고 금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승려들은 수행에 매진하여야 하며, 불탑을 세우고 공덕을 쌓는 일은 재가인의 역할과 의무임을 구분한 것이다. 실제로 장아함권1 유행경 등에서 불탑을 건립할 때 사거리의 한 복판에 위치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그래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탑을 보고 붓다를 생각해서 공덕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불탑은 처음부터 승단과는 무관했으며, 또 사원안에 위치하고 있지 않았다.
실제로 붓다의 장례 절차 중 화장까지는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승려들에 의해서 진행되지만, 사리 분배부터는 인도 당시의 최고 강대국인 마가다국의 왕 아사세의 주도로 향성바라문이 진행한다. 사리를 모시기 위해 모인 종족과 국가는 총 8곳으로 당시 불교가 전파된 지역과 그 유행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유행경'에서는 사리를 분배받은 나라를 1. 쿠시나가르 2. 파바 3. 차라 4. 라마가 5. 비유제 6.가비라 7. 바리샬리 8. 마가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분배받은 사리를 가지고 고국으로 돌아가 각기 불탑을 건립한다. 이것이 근본 8탑이 된다.
(추가 필요) 불탑을 건설할 때에 어떤 형태로 할 것인지에 대한 부처님의 유훈이 바리를 엎어놓고 그 위에 주장자를 세운 모습으로 하라는 유훈이 있어서 스리랑카 등 상좌부 불교권은 거의 그 모습을 따르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자료도 찾아서 넣으면 불탑의 원형이 무엇인지도 알게 하는 내용이 될 것 같습니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 편찬 회의: 1차 결집>
붓다 열반 이후 불교의 전통을 유지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전을 편찬해야 할 필연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장례의 주관자였던 마하가섭이 주도하는 1차 결집이 이뤄지게 된다. 결집이 개최하기에 가장 권위 있는 장소는 붓다의 입멸처인 쿠시나가르였을 것이다. 하지만 쿠시나가르는 소국으로 많은 승려들이 장기간 결집하는 후원을 지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마하가섭은 마가다국의 왕사성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마가승기율 권32에 "왕사성 위제희 부인의 아들 아사세왕은 붓다께 가장 신임심이 깊은 사람으로 평가 받은 바 있고, 왕에게는 500인 을 수용할 수 있는 공양구가 갖추어져 있다."라고 기록되어 잇다. 그 이유로 결집은 마가다국 외곽의 산 중턱에 위치한 칠엽굴에서 3개월 동안 진행되게 된다. 이 때 승단을 대표하여 참석한 인원이 500명인 점을 반영하여 500결집이라고도 하며, 장소에 따라 칠엽굴 결집이라고도 한다.
마하가섭이 주도한 이 결집에서는 먼저 우바리가 율장을 암송한 뒤 아난이 경장을 암송하였다. 그리고 암송한 내용을 500명의 승려들이 같이 합송하였다. 당시 인도에는 문자가 있었지만, 성스러운 것을 문자로 기록하는 것은 불경하다고 생각이 지배적이였다. 그렇기에 각가의 설 가운데 틀린것을 교정하고 고쳐서 모두 함께 외우는 합송으로 1차 결집을 끝나게 된다.
<초기 교단을 주도했던 석가족과 왕사성파>
붓다의 중도주의는 교단을 우선시 하기 보다는 개인의 완성을 중요시 한다. 그래서 대제자들 중심으로 그룹을 이루어서 수행하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지역과 민족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는 요인이 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두 집단이 석가족과 왕사성과 그 주변의 인물로 이루어진 왕사성파이다. 왕사성파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2년 뒤 왕사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교화가 성공하면서 발전하게 된다. 이때 우루빈라가섭, 나제가섭, 가야가섭의 삼형제가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이들은 본래 불을 섬기던 바라문이었는데, 첫째인 우리빈라가섭이 500명, 둘째 나제가섭이 300명, 막내 가야가섭이 200명 제자를 거느린 마가다국의 이름높은 교단의 지도자들이였다. 우루빈라가섭이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귀의하자 다른 형제들도 역시 귀의하였다. 우루빈라가섭은 나이가 많았으므로 이후 세력은 자연스럽게 사리불과 목건련쪽으로 흡수하게 된다. 그 세력 중 일부는 왕사성 인근의 출신 마하가섭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석가족 집단은 붓다가 출가한지 8년 뒤 고국인 가비라국으로 귀향했을 때, 붓다의 사촌들이 중심이 되어 석가족 다수가 출가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아무래도 같은 종족의 집단으로 출가하면 서로 의지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그룹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가 싶다. 선견율비비사 권13에는 붓다가 왕자시설 마부였다가 출가한 차익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승려에게 '붓다는 우리 집안의 붓다이며, 불교의 가르침 또한 우리 집안의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단편적이지만 이를 볼때 불교 교단에서 석가족은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석가족파와 왕사성파의 충돌>
석가족와 왕사성파는 서로 2차례 충돌하는데, 두번 모두 왕사성이 승리한다. 하지만 아리러니하게도 최종 승리는 석가족에게 돌아간다. 첫번째 충돌은 붓다의 만년에 일어난 일이고, 교단의 승계와 관련된 일이였다. 그것은 제바달다와 사리불의 충돌이다. 제바달다가 오법을 주장하고, 사리불과 목건련은 반대하고 있었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출요경 권16에는 제바달다가 "붓다는 이제 사리불과 목건련만을 찬탄하고 동생인 나는 천대한다"라며 볼멘 소리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훗날의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제바달다와 사리불의 갈등 관계를 잘 나타난다. 결국 사리불의 왕사성파가 승리하고 제바달다는 교단에서 독립하는것으로 마무리된다.
두번째 충돌은 붓다의 입멸 후 쿠시나가르에서 발생한다. 당시 인도에는 가문의 계승자가 장례를 주관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장례를 주관한 자는 왕사성파인 마하가섭이었다. 그런데 멀리 있던 마하가섭이 도착하기 전 아난이 독자적으로 장례를 치르려고 시도하였다. 이런 아난의 행동을 막아선 사람은 석가족 출신인 아난의 사촌 아나율이였다. 그리고 아나뉼이 아난을 제지한 덕분에 마하가섭은 쿠시나가르에 도착하여 아사세왕의 주도로 장례와 1차 결집을 진행하게 된다.
첫번째 충돌때에도 석가족 출신들은 제바달다에게 동조하지 않았고, 제바달다의 동생의 아난은 사리불이 옳음을 지지한다. 이러한 일화를 볼때 석가족은 다분이 개인화되었으며, 석가족 집다은 연령이나 항렬이 비슷하여 특정한 리더가 존재하지 않았음도 알수 있다. 그러한 이류로 석가족 집단은 사리불과 마하가섭의 구심점을 가진 왕사성파에 밀리게 된다.
석가족 집단과 왕사성파의 충돌은 1차 결집에서도 이어진다. 1차 결집때 아난은 사소한 계율은 없애도 된다는 붓다의 마지막 말을 들어 계율의 유연성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마하가섭 모든 계율은 그대로 지킨다는 주장이 통과되면서 아난의 시도는 무력화된다. 게다가 율장에는 1차 결집 때 마하가섭이 아난에게 5~7가지의 문제로 아난을 힐난하였다고 한다. 아난은 붓다보다 24~27세 정도 연하였고, 굉장히 오래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마하가섭이 계족산에 들어가 최후의 선정에 들게 되자 불교 교단은 아난의 주도로 신속하게 재편성된다. 이는 붓다 입멸 후 100년 뒤에 발생하는 2차 결집에서 불교 교단을 대표하는 고승 8명 중 6명이 아난의 제자라는 점에서 분명하게 뒷받침 된다.
사분율 권 54 |
오분율 권 30 |
십송율 권 60 |
마하승기율 권 32 |
비나야피타카 쿨라왁가 11 오백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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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여인의 출가를 간청함 | ||||
2 | 붓다의 시자요구를 거부함 | ||||
3 | 붓다의 가사를 밟고 꿰맴 | 붓다의 비옷 | |||
4 | 붓다께 계속 살아계시기를 권하지 않음 | ||||
5 | 붓다에게 물을 청했을때 바로 시행하지 않음 (열반전 누워계실때 목이 마르다고 함 3번 청하자 물을 뜨러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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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잡쇄계에 대해 묻지 않음 (잡쇄계: 잡다한 계율은 없애도됨) |
소소계 | 미쇄계 | 세미계 | 소소계 |
7 | 여인들이 붓다의 발을 더럽히는 것을 막지 못함 |
여인들이 붓다의 발을 더럽히는 것을 막지 못함 |
|||
8 | 여인에게 먼저 시신의 예배를 허락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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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여인에게 붓다의 음장상을 보여줌 | 비구니에게 붓다의 음마장을 보여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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