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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수 역자 서문

6쪽

저자는 이 책에서 육도윤회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 축색계는 욕망이 지배하는 상태로, 지옥계는 편집증과 공격성 및 불안한 상태로, 아귀계는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으로, 천상계는 인간의 절정 경험으로, 아수라는 경쟁적이로 유능한 자아로, 인간계는 자기동일성의 문제를 추구하는 영역으로 보았다. 또한 저자는 자신의 명상 경험을 토대로 심도 있는 명상의 정신역동적 해석을 한다. --- 정신치료와 병행하여 명상이 활용될때 정신치료를 훨씬 효과적이게 한다고 주장한다.  --- 프로이트 논문 "기억, 반복 그리고 훈습"를 통해서 붓다의 가르침이 정신치료의 실제에 어떻게 통합되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자기의 실체가 없다는 것 즉 무아를 체득해야 한다는 것을 정신분석과 서양 정신치료계에 제시하고 있다. 

 

머리말: 붓다의 문을 두드림

16쪽

불교적 접근은 --- 모든 정신은 명상적 자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치료와 중첩되는 가장 분명한 점이다. 명상에서 요구되는 느림은 일상의 마음을 더 면밀히 살펴보기 위함이다. 살펴봄이 바로 심리학이다. 이 살펴봄의 목적(심리학)은 자기 진정한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만들어 낸 정신적 고통의 생성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17쪽

불교는 이미 오래전에 인간의 나르시시즘을 지면하고 그것을 뿌리 뽑는 기법을 완성하였다. 

 

19쪽

정신 치료가 오랜 기간에 걸쳐 영역을 점차 넓혀가자 불교사상와 유사한 부분이 분명해졌다. 성적이고 공격적인 갈등에서 (근본적인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이유로 인한) 자신에 대해 어떻게 불편해 하는지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것이 자기에 대한 불교와 정신분석의 공통점으로 드러나게 된것이다. 서양의 전통에서는 이를 나르시시즘적인 딜레마라고 불리며, 거짓됨이나 공허함을 느껴서 주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상화하거나 격하시키도록 몰아가는 것을 잘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논란이 야기 되었다. --- 신경증적의 고통의 강력한 원천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치료하는 방법을 발전하지 못한 셈이다.

 

--- 불교 심리학은 자기동일성 혼란감을 출발점으로 하고 점차 견고함과 확실성 또는 안정함을 성취하려는 일상적인 모든 노력은 결국 실패한다고 주장한다. --- 다시 말해 어린 시절이나 성적이나 공격적인 갈등을 발견하여 만족으로 옮기는 것으로 문제를 줄여주기는 하겠지만 나르시시즘적인 갈구로부터 자유를 보장할 수는 없다. 이는 프로이트가 만년에 쓴 논문 '종결할 수 있는 분석과 종결할 수 없는 분석'에서 이런 결핍을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0쪽

불교는 그들에게 무엇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형태로 바꾸는 것을 상당히 어려워하고 있다. 이것은 이국적이고 낯선 접근이기 때문에 불교적 접근이 아직까지는 실제적이지 않고, 메시지는 아직 통합되지 않았다. 이는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 들였을 때와 유사하다. 도교와 융합하여 새로운 혼성물인 중국 불교를 만들어 낸 것 처럼 (불교의 중국화: 도교학자들이 불교적 명상에 능했기 때문)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서 일반 대중의 이식속으로 침투하였던 정신분석의 언어로 붓다의 통찰이 서양인들에게 제세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러한 언어를 통해서이다.

 

1장에서는 붓다의 심리학으로 붓다의 심리학적 가르침을 서양의 정신역동학적 언어로 소개하고자 한다.  --- 프로이트 이론에서 유래된 심리학적인 개념들이 가득차고, 자신의 심리적인 문제가 불완전히 해결된 상태에서 명상에 참여한 서양인들은 자신의 갈망과 갈등, 혼란 때문에 명상의 궤도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제는 붓다의 심리학을 서양의 심리학적 언어로 설명하면서 그러한 불행한 경향과 맞서 싸우기를 희망한다.  

2장에서는 명상으로 순수한 주의집중이라는 기초적인 불교적 주의집중법을 설명하고, 명상의 길을 어떻게 정신역동적인 용어로 이해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다. 심리학적인 토대를 제공하여 고대기법이 어떻게 현대 서양인들에게 연관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 전통적인 서양의 정신치료와 명상이 만났을 때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지 분명히 말하고 싶다.

3장에서는 치료부분으로 프로이트의 논문 "기억, 반복 그리고 훈습"을 가지고 붓다의 심리학이 어떻게 정신치료의 실제와 통합할 수 있는제 형틀으로 사용하였다. 

 

1장 필요성과 방향

2장 불교 명상의 개념, 전통서양정신치료에서 바라본 명상

3장 실제편

 

 23쪽

불교심리학은 인간 정신에 대한 불교 심리학의 포괄적인 관점에 대해 논의한다. 불교는 심리학적 형태로 보자면 심층심리학이다. --- 붓다를 최초의 정신분석가라오 해도 무방할 것이다. 혹은 분석적 탐구 방식을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윤회의 전통적인 묘사, 4상제에서도 우리는 분석적 탐구의 결실을 발견한다. 

 

1장 마음에 대한 붓다의 심리학

 

숭산 스님과 티벳 스님의 일화.. 숭산은 그가 어떤 반응을 하든지 간에 마구 내려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꼈다. 티벳 스님은 조용히 앉아서 염주를 굴리면서 반응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선사는 오렌지를 티벳스님 코 앞까지 가져갔다. 칼루 린폰체는 아주 천천히 몸을 굽혀서 통역을 수분동안 했다. 그러고는 말했다. "뭐가 문제인가? 그 나라에는 오렌지도 없나?"하고 린포체가 말했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1. 윤회 : 신경증적 마음에 대한 불교적 모델

 

32쪽

원의 중앙에서 서로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는 돼지, 뱀, 수탉으로 상징된 힘이 이 그림의 핵심이다. 즉 탐욕과 증오, 미혹에 이끌리는 존재가 잇는 한 그들은 자신의 불성에 대해 모르고 세계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고통스럽다는 것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윤회에 속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윤회에 내재된 고통에 대한 불교적 관점 중 가장 매력적인 것 하나는 고통의 원인이 곧 해탈이 원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즉, 고통받는 자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주어진 영역이  깨달음을 위한 수단이 될지 속박이 될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33쪽

각 영역의 작은 불상은 각각의 차원을 왜곡하고 고통을 영속시키는 잘못된 지각을 어떻게 바로 잡는지 상직적으로 가르쳐준다. 

불교는 우리가 어떤 영역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충분한 경험을 얻지 못한 채 그것을 끌어안을 수도 없는 채로 두려움에 떨면서 육도를 순환한다고 가르친다. --- 또 다른 방법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심리학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윤회전체에 대한 탐구를 필요로 한다. 각각의 영역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신경증적 고통을 반영하는 모든 영역으로서 다른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가 된다. 불교에 따르면 고통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직접 경할 때 느끼는 두려움이다. 

 

34쪽

신경증적인 마음을 외면하는 동안에는 깨달음은 마음의 발견은 할 수 없다. 프로이트가 예언적으로 언급했듯이, 허깨비 같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각각의 경험 영역에서 명확히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그때만 보편적이라고 인식한 고통이 변화될 수 있다. 생존의 6영역은 윤회로부터의 해탈은 열반이라고 묘사되고 인간계로 부터 빠져나가는 길로 상징된다. 즉, 고통으로 부터의 해탈은 천상의 어떠한 영역에서 이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변화에 따라 획득된다는 것이다. 

- 화, 공격, 불안, 공포(진), 편집증, 사랑과 미움
- 상대를 향한 공격성의 에너지는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초래한다. 
- 어린시기에 사랑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치게  좌절되어
  자신과 타자를 향한 분노로 전환된 것
- 자기, 타자 비난이 심함
지옥 거울
인식할때
자각
정신분석 위니코트
동물적 본성, 욕구
성에 대한 열망과 한계
축생   정신분석 프로이드
구강기적 갈망,
열망적 속성
환상과 실질적 충족
아귀 영양분
비판단적인
자각
정신분석  
궁극적 경험
융합점 이해
천상 비파
몽환에서
깨어남
인간주의 칼 로저스,
아브라함 매슬로우
유능한 자아
자아의 자유로움
아수라 불타는 칼 자아심리,
행동주의,
인지주의
칼로저스?
자기 동일성 인간   나르시시즘
심리학
하인츠 코헛
(Heinz Kohut 자기심리학)
위니코트
구분 순기능 역기능 티벳윤회도
지옥도 자기보호 - 6식 수준의 화
해로운 업력 - 7, 8식
선사들의 화는 자비심에서
나온것이므로
물이 새는 것과 같다
공격성, 분노, 불안,
공포, 폐쇄공포증
거울을 든 관세음보살
아귀도 노력 지칠줄 모르는 욕망, 갈망 사람을 든 관세음보살
축생도 강한 추진력 식욕, 성욕, 타자인식 결여,
자기중심적
책을 든 관세음보살
아수라도 뛰어난 현실감각 질투, 경쟁, 편집증, 망상증,
이상에 집착
불을 내 뿝은 칼을 든
관세음보살
천상도 지복, 희열, 환희,
심미적 쾌락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 비파를 든 관세음보살
인간도 자아추구, 열정적 관념적, 고착화된 사고
자아정체성에 대한 혼란
붓다의 모습

 

<능엄경 9권의 지옥에 가게 되는 자 - 10가지 습기의 원인>

1273쪽

1. 음욕의 버릇

서로 교접하는 것이 비비는 데서 생기니, 비비기를 그치지 아니하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불길이 일어는 것은 느낌.

무쇠 평상과 구리 기둥등으로 가하는 고통을 받게 됨

 

2. 탐하는 버릇

서로를 헤아리는 것이 서로 흡입하는 것(업신여기기)에서 생기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추워서 벌벌 떨며 피부가 푸르고 붉은 것을 느낌

얼음 지옥에서 고통을 받게 됨

 

3. 교만한 버릇

서로 뽐내는 것에서 생기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허공에 날고 파도에 달려가서 물이되는 것을 느낌

핏물, 잿물, 뜨거운 모래, 독이 있는 바닷물, 구리를 녹인 물을 마시는 고통을 받게 됨

 

4. 성내는 버릇

서로 충돌하는 것이 서로를 거스리기 때문에 기를 녹여 쇠붙이가 되기 하기 때문.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칼산, 쇠말뚝, 칼나무, 칼수레, 도끼, 작구, 쇠창, 톱등으로 가하는 고통을 느낌

살기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거세당하고, 잘리고, 목을 베이고, 도끼로 찍히고, 톱으로 썰리고, 찌리고, 

쇠몽둥이로 얻어 맞고, 매질 당하는 고통

 

5. 꾀이는 버릇

서로 유인하는 것이 서로 아첨하는데 생기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밧줄과 나무로 목을 조르는 느낌

지옥에서는 쇠고랑, 수갑, 목에 차는 칼, 족쇄, 채찍, 곤장, 회초리, 몸둥이 형틀로 가하는 고통

 

6. 속이는 버릇

서로 무고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깨끗하지 못한 티끌, 흙, 똥, 오줌 따위의 더럽고 추한 것을 느끼게 됨

지옥에서는 빠지고, 솟아오리고, 날고 떨어지고, 뜨고 가라앉는 따위의 고통

 

7. 원망하는 버릇

미워하고 한을 품은데서 발생하기 때문에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돌을 날리고 바위를 던지고 뒤주에 가주고 함거에 싣고 독안에 담고 자루에 넣어 메치는 따위를 느낌

가슴에 악독함을 품어 쌓는 것과 같음. 발로 차이고, 얻어 맞고 활로 쏘이고, 잡아 끌어당겨 움켜쥐이는 따위의 고통

 

8. 송사하는 버릇

서로 밝히는 것이 서로를 어기는데 발생하기 때문에 배반하는 것으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왕사와 관리가 문서로 증명하고 집행관이 문서를 가지고 고문하고 신문하고 추국하며 살펴 찾고 파혜치고 밝혀내어 왜곡된 것을 판단하는 느낌을 느낌. 

가슴을 찔리고, 혀를 뽑고, 불로 볶이고 몽둥이로 매질을 당하거나 말로 변명하는 따위의 고통

 

9. 아첨하는 버릇(억울)

모함하는 것이 서로를 비방하는 데서 생기기 때문에, 비방하고 해치는 습기는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산이 합해지고 돌이 합해지고 맷돌로 갈아서 부수는 따위의 고통을 느낌

억눌림을 당하고 티틀거리고 몽둥이로 맞고 쥐어짜이고 거꾸러 매달리는 따위의 고통

 

10. 다투는 버릇(덮어씌우는 습기)

시끄럽게 하고, 서로를 속이고 가리고 감추려고 하기 때문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거울로 비추거나 촛불로 비추어지는 느낌, 햇볓에 그림자를 숨길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

나쁜 벗과 업보의 거울과 불구슬로 전생의 업보를 파헤쳐 증거를 대질하게 하는 고통

 

 

*순기능 역기능 기록하기

신경증은 자기 탐닉과 도피를 한다. 사랑와 미움(지옥), 성에 대한 열망과 한계(축생), 환상과 실질적 충족(아귀), 자아의 자유로움(아수라), 융합점 이해(천상)

 

35쪽 

자기의 모든 측면을 되찾은 데 대한 관심은 육도라는 불교적 관점으로 볼때 근원적인 것이다. --- 그 우리를 되찾고 다시 기억하는 방법을 연습하는 기회는 풍부하며, 그 방법은 명상속에서 배우게 된다 . 6가지 영역의 모든 재료(집착)들로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어느 측면이 이해되지 않고 다시 말해  단절, 투사, 거절, 탐닉하거나 혹은 동화되지 않은 채로 있다면 거기에 탐진치가 붙게 된다. 그러면 사람이나 세상에 대해 만족스러운 만남을 갖지 못하고 두려움을 흡수하며, 소외된 자기에 대한 방어벽을 만들어 내게 된다. 빌헬름 레이히가 성격 형성에 대한 연구에서 인격은 자기소외라는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실재로 간주하는 우리 자신은 단지 우리가 자각하고 싶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발도르프 반감 설명)

예) 어머니의 정서적인 부재 - 분노와 공포 -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감정(자기 동일성)

이후 진행과정의 이야기는 잘 모르겠음

* 자기섬유(fabric of self) ? : 무의식적 거부가 의식화되고 수용, 관용될 통합될 때 자기는 하나가 되고 자의식의 껍질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고 자비의 힘으로 자동으로 풀려난다. 위와 같은 사례에서 어머니가 뇌사가 되었을 때 어머니의 정서적 부재에 대한 자신의 공포를 알게 되고, 이후 어머니가 처한 정서적 곤경에 공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수치심이 그것을 가로 막은 것이다. 

 

36쪽

불교를 공부함은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고, 
자신을 공부함은 자신을 잊는 것이고, 
자신을 잊는 것은 다른 것과 하나됨이다.
 - 도겐

 

 

*도겐: 일본 조동종의 종조, 1227년 송나라에 들어가 중국 조동종의 선승인 장옹여정에게 가르침을 받음. 1229년 귀국해서 조동종전파. 도겐은 묵조선을 수양하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제창함. 도겐의 조동종에서도 주관적 관념론의 철학사상이 분명히 드러남. 선종이 일본이 전파되자 막무 장군의 지지를 받았다면 조종동의 신도는 하위층 농민들이였다. 

 

37쪽

윤회의 가르침은 육도 윤회 중 1,2개의 영역에만 억압을 들어내는 것을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열정과 단절된 사람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 만큼이나  균형을 잃고 견디지 못한다고 하였다. 서구의 많은 정신치료는 한 영역의 고통을 상당히 깊이 있기 연구했지만 누구도 윤회전체를 탐구하지는 않았다. --- 그것들은 각각 전적으로 하나의 차원에만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 불교는 전체 만다라를 신경증적 마음의 반영으로 보고 포괄적 접근을 요구한다. --- 불교는 특히 인간 영역 안의 고유하고 특별한 기회를 강조한다. 이 곳이 바로 해탈로 향항 길의 도출이기 때문이다. 이 영역의 순수 주의집중이 명상기법이 되는 것이다. 이 명상 기법은 다른 영역의 치료들을 가장 효과적인 치료으로 뒷받침 한다. 인간영역은 다른 모든 영역으로 퍼져 나간다. 그것은 윤회의 중심축이자 나르시스의 영역으로 자신을 찾고 자신의 그림자에 사로잡혀있다.  

 

가. 지옥계: 공포 및 공격성의 상태

39쪽

지옥은 공격성과 불안의 상태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지옥의 중생들은 분노에 불타거나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것이 자기 마음의 산물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격노와 불안에 지배되어 자신 마음으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 원치 않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채 자신의 감옥을 만들어 갇힌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은 거울이나 정화의 불꽃을 가지고 지옥의 영역에서 들어나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 원치 않은 감정을 마주하면 그 고통이 완화된다는 뜻이다. 인식할때 감정차제가 치유된다. 

에피소드: 동생이 태어난 첫째 딸이 바람을 무서워하는 두려움.. 딸은 엄마에게 분노하고 있었고, 그것을 깨닫자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해결되었다. 엄마와 딸의 싸움놀이로 발전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딸은 거의 격려를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마루가 꺼질듯이 뛰고 웃고 소리지르고 껴안고 주먹으로 치고 놀면서 딸의 투쟁정신을 찾게 되었을 때 바람에 대한 두려움이 감소되었다. -- 딸이 바람과 맞서서 싸우는 연습을 해보거나 바람속으로 달려가도록 용기를 주기도 하였다. 부모가 딸의 분노를 견질 수 있다는 것, 엄마의 독점적 관계의 소실에 대한 분노를 이해한다는 것을 딸이 알게 되었을 때 공포증은 사라졌다.  이후에도 딸은 그 일화를 웃음으로 회고한다. 

 

위니코트의 좋은 어머니상 : 아이의 공격성을 파괴하지 않고 다룰 수 있고, 공포로 위축하지 않으며 격노해서 복수하지 않고, 모성을 포기하는 일 없이 공격으로부터 살아 남을 수 있는 어머니를 의미한다. 이는 결국 어머니의 입지를 다지며, 한계를 설정하고, 경계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좌절의 요소를 아이의 경험에 스며들게 한다. 유아의 연장으로 경험되는 상태에서 어머니의 분리가 이해되는 상상태로 성숙하게 된다. 

 

41쪽

원치 않는 감정을 인식하기를 거부할때, 우리는 화가나고 자기를 합리화하면서 그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종교는 공격적인 마음을 견손, 경견함으로 대체하라고 하고, 정신분석은 그거을 이해하고 충동과 갈망을 수용하라고 하지만 불교만은 중도를 취한다. 이것은 그러한 감정으로 부터 벗어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동시에 벗어나기를 위한 감정에 대해 비판단적으로 자각하는 것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42쪽

아이들의 분노와 공격적인 충족은 어머니가 그것을 올바르게 충족할 때 유아 자신의 나이에 맞지 않는 관계 방식을 없애게 되고, 올바르게 충족하기 않게 된다면 아이의 분노는 끝없어지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여기에서 불교적 접근을 하자면 자신의 분노와 관계를 맺게 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능력이다. 이것은 위니코트가 말한 수용이 된다. 

 

 

나. 축생계 : 식욕, 성욕 생물학적 욕구의 체계

43쪽

어리석음을 뜻한다. 그래서 보살상은 책을 든 모습인데, 동물적 본성에 부족한 사고력, 언어능력, 반성능력을 상징힌다. 또한 승화의 개념이기도 한다. ---- 궁극적인 행복은 감각적 쾌락에서 유래될 수 없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불교의 교리와 맞는다. --- 쾌락은 영원히 유지할 수 없고, 그것이 달성되면 다시 빈곤, 불안, 분리, 욕구 긴장의 상태로 돌아간다. 쾌락적인 감각 경험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만족의 상태에 이르게 되며, 이는 무한정 유지 되지 않는 쾌락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44쪽

쾌락의 원리에 다르면, 원하는 어떤 상태가 연장되면 가벼운 만족의 느낌만 일어난다. 이것은 강력한 쾌락을 얻는 것은 뚜렷이 대비되는 것에서 오는 것이고, 계속되는 상태에서는 얻기가 어렵다. 그리니, 행복의 가능성은 이미 우리 자신의 속성상 한정되는 것이다. 

 

다. 아귀계 : 분노와 욕망의 융합

46쪽

뚱뚱하게 부풀어진 배, 길고 가는 목을 가진 아귀, 분노와 욕망의 융합을 상징한다. 아귀들은 성취되지 않는 갈망으로 고통받고, 불가능한 만족을 끝없이 요구하면서 과거의 이루지 못한 욕구들의 충족을 추구한다. 그들은 내부의 공허함을 드러낸 존재이고, 이미 일어난 일을 수정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는 존재이다. 이들은 대부분 과거에 집착한다. --- 순간적인 만족에도 받아들이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환상속에 있기 때문에 욕구가 환상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고유의 갈망이 허깨비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뒤들은 정신치료자의 도움을 받더라도 깨달음을 성취하기 어렵다. ---- 관세음보살은 정신적 영양물을 상징하는 물질을 가득 들고 아귀영역에 나타난다. 먹는 음식은 만족시켜 줄 수 없다. 다만 붓다가 완성한 비판단적인 자각만이 구원이 된다. 

 

 

*타라 에피소드: 명상을 시도하면 혼자서 앉아 있지 못하고 뛰쳐나와야 할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자신이 가장 갈구하는 것(누가 만져주는것)을 두려워했고, 순간적인 만족감을 경험할 수 없엇다. 바람피는 것이 해방적인 관계이고 환상을 만드는 것이였다. 타라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몰랐다. 의견을 나누는 것 조차 반대했고, 환상의 비실재성, 존재도 인식할 수 없었다. 그러한 열망을 표현하게 된 때는 바로 어머니에게 고통받음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점이였다. 그때 부터 좌선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고, 자신에게 친밀감을 보였던 사람들을 낮게 평가하던 강박증적인 욕구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49쪽

무제한적 풍요에 대한 이런 필사적인 갈망이 서양 정신에서는 매우 일반적이다 서양에서는 그것을 낮은 자존심이라는 가면을 쓴다고 표현한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동양권 불교스승들이 서양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힌 서양인의 마음상태이다. 서양정신에서 공허함과 무가치함이라는 내적 느낌은 동양에서 서양 스승에게서는 거의 믿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서양제자들이 동양인 스승에게서 느끼는 치유환상은 어떠한 정신적 풍조에서도 다뤄지지 않는다. 아귀의 공허함이 불가능한것처럼 공허함과 무가치함 같은 느낌을 받은 서양제자는 공허함 그 자체를 명상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때 만이 자기염오가 지혜로 전환될 수 있다. 

 

라. 천상계 : 감각적 지복, 희열, 환희, 심미적 쾌락 장소

 

50쪽

사랑하는 것과 하나가 되고 일시적으로 자아의 경계를 허물면서 즐거움의 경험을 가진다. 이것은 게슈트랄 심리에서 보여지는 융합점이라고 부르는 상태이다. --- 자아는 일시적으로 해체된 어떠한 완결된 경험에 대한 만족이다. 불교수행에서는 연마되는 강력한 상태이나 경고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일시적인 휴식과 피난처로 남아 스스로 만족하게 끔 하는 경험들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 관세음 보살은 루트라는 악기를 들고 나타난다. 즐거움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음악적 즐거움을 붓다의 가르침의 소리로 바꾸고 그들을 잠이나 몽환의 상태에서 깨어나게 한다. --- 영광스러운 월계관속에 있지만 그것은 어느날 추락한다고 루트를 소리내어 말한다.

 

51쪽

융합점의 어려움은 2가지 타입으로 구분된다. 건강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게될 융합점에 집착하는 것과 멀어지는 것이 있다. 집착하는 타입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동일감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이 숨 쉴 수 있는 다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들은 연결고리가 끊어질까 두려워하고 --- 다른 이들과의 소망이 자신의 소망과 갈등을 빚게 되면 견딜 수 없어한다. 마치 그 들은 알콜중독가정에서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술마시는 사람으로 만들거나 그러한 환자들과 상호의존적 관계이 있게 되는것이다. 2번째 타임은 독립을 재촉받았기 때문에 융합이 초래할 수 있는 자기붕괴로 불안하게 한다. 초기 부모에 대한 애정의 불충분함으로 성인에도 그런것이 예상되면 접근을 두려워한다. 어릴 때 부터 만든 자아경계선을 지키면서 오르가슴의 순간에도 긴장하거나 뒤로 물러선다. 그들은 긴장을 의식하지 못하고 어떻게 속는다고 느끼지만은 그들의 고립감의 근원은 의식하지 못한다. 

 

*제임스 에피소드 : 자신이 원하는 상대와 하룻밤을 잔 후, 행복감을 느꼈지만, 다시는 그녀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 전혀 알 수 업었다. 또한 20년 된 부인이 떠난다고 했을떄 심하게 불안해 했었다. 융합의 상태와 그와의 관계는 매우 연락했다. 사춘기때는 추구하기도 하고 도피하기도 했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경험이 사라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경험을 다시 만들 자신이 없었고 그는 그 경험의 존재와 부재에 대해 모두 불안헤졌다. 

 

52쪽

천상계는 자아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일시적으로 붕괴시키기도 하는 사람의 능력을 상징한다. 기쁨, 미적, 지적인 쾌락의 기쁨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 갈망의 대상이 고통의 강력한 원인이 된다. -- 프로이트는 이것은 대양적인 느낌이라고 하였고, 그것은 바로 천상의 영역이다. 붓다가 말한 신비적인 경험은 아니다. 

 

마. 아수라계 : 공격적인 힘을 구체적으로 표현 된 것, 자아의 적극적인 노력을 구체화한 그 존재들은 끊임없는 경쟁적 힘 에너지

53쪽

천상계의 한 부분으로 묘사되거나 고유 영역으로 묘사되기도 함. 두 집단의 아수라들이 열매가 많이 달린 소원을 비는 나무를 에워싸고 두편으로 나누어  싸운다. 자아의 적극적인 노력을 구체화한 그 존재들은 끊임없는 경쟁적 힘을 통해 천신의 열매를 얻고자 노력한다. 그들은 에너지를 상징한다. 이 에너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경험을 접촉하기 위해 필요하다. 접촉이 성취될때 천상의 만족감이 따라온다. 어쨋든 장애물에 접근하고, 파괴하고 동화시켜 만족으로 향하게 하는 공격적인 힘을 구체적으로 표현 된 것이 아수라이다.---- 이 장면에서는 분별적 자각을 필요로 하는 불타는 칼을 들고 나타난다.

-- 불교가 수동적, 금욕적, 반자아적인 평판에도 불구하고 자아와 공격성의 이 아수라계 상위차원에 속해있다. 길들이고 숙달되고 자기를 제어하고 적응하는 고전적인 자아 기능들은 분명히 불교의 우주관에 가치 있는 것이다.

 

54쪽

자아기능은 마음챙김이라는 핵심적인 명상 수행의 기초를 형성한다. --- 순간 순간의 알아차림을 함양시키기 위해 자아의 기능이 필요하다. --- 아수라들이 자신으로 부터 계속 소외되게 만드는 무의식을 파괴하고 동화시키면서 그들로 하여금 방향을 전환하도로고 한다. 사물을 소유하고자 하는 시도에서 벗어자 자각의 성취를 향한 쪽으로 자아 기능을 바꾸게 한다. 명상은 다양한 자아기능을 낚아채려고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아기능들이 자유로워야 된다. 그 자유로움이 정신치료에서 과제가 된다.

 

그녀의 에피소드; 에너지가 많은 작가는 어릴때 아버지가 모든것을 통제하면서 몸을 엄격하게 다루면서 흥분을 억누르는 방법을 배웠고, 그 결과 두통이 나타났다. 적극적이로 흥분된 에너지를 즐기거나 성취하기 보다는 두통으로 치환되어 자신의 몸으로 온 것,

 

이웃의 에피소드: 공격성으로 부터 스스로를 단절시켰다. 배신을 상상하거나 연인의 공격성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하거나 격리된 채로 남겨지게 되었다. 

 

바. 인간계 : 나리시시즘에 대한 혹은 창조적인 활동의 영구적인 관심

56쪽

신경증은 자기 탐닉과 도피를 한다. 사랑와 미움(지옥), 성에 대한 열망과 한계(축생), 환상과 실질적 충족(아귀), 자아의 자유로움(아수라), 융합점이해(천상)

-- 낮은 영역은 수용하기 어려운 욕망과 관심의 관계, 높은 영역 중 아수라와 천상은  자아기능과 일시적 소멸의 영역, 인간계는 자기에 대한 탐구 영역, 나리시시즘에 대한 혹은 창조적인 활동의 영구적인 관심이다. 

 

57쪽

인간계가 문제는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 공허함,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느낌. 소외감과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있다. 그 감정의 배후에는 주목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느낌이 자리 잡고 있다. 정신분석가는 주목이나 인정을 반영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확신이 없는 것이다 

 

* 아이 에피소드: 본능적인 욕구 충족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선호하는 아이가 있고, 부모는 자신의 양육방식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아이는 거짓 자아를 어쩔수 없이 만들어 낸다. 이후 실제를 느끼기 위해서는 거짓 자아의 형성에 저항한다. 다시 말해 거짓자기 형성을 통해 자신으로 부터 단절하게 되고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표현을 할 수 없게 된다. --- 부모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면 자신을 감추려고 한다. 위니코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숨는 것은 즐겁지만 발견되는 재앙이 된다. 

 

59쪽

불교적 관점에서 인간의 영역은 거짓 자아 뿐만 아니라 자기의 진자 본질에 대한 초월적인 통찰의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여기서 공이 발휘된다. 공을 이해하면 할 수록 자신에 대해 진정하게 느낄수 있다고 한다. --- 비실재성에 대한 공포가 있는 곳, 소통되지 않는 요소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

 

사: 욕망, 분노, 무지: 초록뱀, 붉은 수탉, 검은 돼지

 

60쪽

첫번째 물결은 삶과 죽음의 본능은 억압된 욕망과 분노. 어떤 측면에서는 불교의 뱀과 수탉에 상응한다.

두번째 물결은 진정한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와 혼란, 무지로부터 초래된 공허함과 불확실함, 소외와 같은 우리 내부의 결함을 드러낸다. 이것은 검은 돼지에 비유되는 어리석음이다.

 

61쪽

각 윤회에 해당하는 보살상은 각 단계의 감정을 다루는 또다른 방식을 배우는 것을 가능함을 암시한다. 깨달은 사람은 세상안에 있되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견해는 탐진치를 본능 충동이라고 보는 견해와 다르고, 조절 규제하거나 통제해야 한다는 것, 충동을 의식적으로 접근하여 변화시킨다는 과정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후자에 해당한다. -- 전체의 윤회는 우리가 고통을 대하는 방식을 변화함으로써 고통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한 것이다. --- 깨달음을 얻으려면 스스로에게 등불이 되어야 한다.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윤회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탈은 자기 자신과 모든 범위의 인간 경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능가경에서는 사물은 보이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행위는 존재하지만 행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62쪽

실재하는 개별행위자의 부재에 대한 강조는 불교심리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낸다. 윤회의 경험을 전환하는 것은 바로 그과 같은 깨달음이다. 진정한 생강은 생각하는 자를 필요하지 않는다(W. R. Bion). 자신의 통찰에 집착할 때 정신분석적으로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이고 말한다. 이러한 관념은 비온이 제시한 나르시시즘의 제거이다. --- 붓다는 처음에는 그의 깨달음을 설파하기를 주저했다.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까 봐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재비심으로 마음을 바꾸어 그 가르침을 사성제로 정립했다. --- 그 첫째의 진리가 우리는 삶에서 굴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도, 두번째가 굴욕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인 원초적 갈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세번째 진리는 해탈을 약속하고 네번째는 해탈성취방법을 말한다. 본질적으로 붓다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해방된 정신으이 면모를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 즉, 사성제가 불교심리학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2. 굴욕(이해) : 고, 이해 피할수 없다. 굴욕인정

64쪽

첫 번째 진리는 심리학적 용어로는 굴용의 불가피성을 말한다. 그의 통찰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솔직하게 검토하도록 요청한다. 솔직함이란 우리가 되도록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 붓다의 가르침

65쪽

붓다는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하더라도 자족이라는 환상을 유지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모두 늙고, 죽음을 피할수도 없으며, 실망과 상실 질병을 피할수 없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이미지 안에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헛된 투쟁을 하고 있다.우리 살멩서 운명을 컨트롤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가는 위기가 닥칠때 필연적으로 들어난다. --- 사성제는 이러한 취약성을 출발점으로 삼아 억압적이고 도망칠수 없을 것 같은 삶의 굴욕에서 겸손을 길러준다.이런 것은 염세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이와는 달리 상당히 낙관적이다. -- 붓다는 나르시시즘에 대한 모든 모욕은 공격적으로 부터 도피가 아니라 보호가 필요한 자기에 대한 확신을 뿌리 뽑음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나. 고통

66쪽

첫 가르침은 전법륜경에 있다 녹야원에서 정각이전에 그와 함께한 오비구에게 행하였다. 

*전법륜경: 녹야원 오비구에게 첫 설법 팔고를 설명: 생노병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성음고(오음의 탐욕과 집착의 괴로움-오취온은 고통)

 

67쪽

3근원에 대해 불만족의 느낌을 설명함. 첫째는 생노병사, 둘쨰는 호불호, 셋째는 자신의 인격이 일반적인 불편한 느낌의 원인이 된다. --- 우리는 스스로에게 불만족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성, 비실체성, 불확실성, 불안정이라는 감정에 영향을 받고 있고, 그러한 불편이 마술처럼 해결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 -- 우리는 어린시절에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불안에 상처 받기 쉽고, 쓸모없다는 느낌이나 비실재의 느낌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남는다. 혹은 소외감, 해체, 합병이라는 대립되는 두려움 사이를 배회하면서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모른다. 독립성에서나 관계에서 명확함을 추구하지만 ---- 우리의 자기 동일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확고하지 않다.

                                                                             

다. 자기라는 이미지

 

68쪽

나르시스 신화는 자기의 실체에 대한 근본적인 불확실성 때문에 힘을 얻는다. --- 이미지가 주는 완전함에 사로잡혀 자신의 비실재성을 완하고 의지할 수 있는 견고한 것을 갖게 된것이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 만들어진 것의 집착으로 나르시스는 죽고 만다. 

 

* 자기에 대한 근심은 공허 - 뱀과 새끼줄 이야기

  자기는 원래 없는 것이며 모든 고통과 근심 공허함은 여몽환포영 

 

69쪽

불교 명상은 나르시시즘을 타파하고 드려대는 시도이다. 붓다는 우리 모두를 나르시스로 본다. --- 견고한 자기를 만드는 것에 벗어나 성스러운 진리로 주의를 돌릴것을 말한다. -- 프로이트는 자신에 관한 불쾌한 사실을 참아내지 못하는 것은 나르시시즘의 핵심이라고 한다. -- 우리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완전하고 자존감을 주는 이미지에 우리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욕구에 빠질 수록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진짜가 아니게 된다. 나르시시즘은 우리가 자신을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라. 분석가의 목소리

 

73쪽

프로이트의 핵심이 되는 나르시스적 충격은 욕망과 만족사이에 건널 수 없는 틈이다. 불교에서는 신불멸과, 현실적 대상에 대한 욕망이다. -- 랭크는 자아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에 부합되면 자아 구조를 풀어서 해체할 준비가 되어 있고, 만악 해체할 수 없게 된다면 그때 불안감, 혼란함, 자기로부터의 소외감을 가져오게 된다고 하였다.

 

75쪽

개별화과 고립에 대한 두려움은 자기에 대한 불안으로 가는 길목이 아닐까? 나르시시는 그런 아미지에 집착하면서 두려움을 숨길려고 한것이 아닐가? 고정되고 영원한 진실한 자기라는 것이 두려움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것은 아닐까? -- 이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불확실성의 문제와 불안정한 의심하는 자기에 대한 문제로, 정신분석의 메인 테마가 되었다. 붓다는 --- 바로 이 자기동일성의 혼란에 대해 직접적이고 명맥하게 설파하였다. 

 

위니코트는 부모의 환경이 충분히 탄력적이지 못해서 분리되거나 자아의 짐을 더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일관성을 부여한다. 그 일관성이 거짓 자아이다. 거짓 자아는 착취와 관심 부족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해준다. 그것은 양육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발생하는 자족이고, 매정한 부모의 환경으로 부터 도피하여 생존하게 하는 순응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위니코트는 불만족의 원인이 거짓 자기에 대한 경직성이라고 보았다. --- 불만족스럽고 단절된 타협에 불과하여 원초적 박탈감을 영속케 한다. 이는 비생동적이고, 비자발적이고, 고립된 마음이라는 개념을 공고하게 할 뿌니다. 고통은 개인의 영원한 고립이다. 

 

마. 잃어버린 지평

76쪽

프로이트는  자신 앞에 투사한 이상형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이상형이었던 유아시절의 잃어버린 나르시시즘의 대체물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 안에서 내재하는 불확실성을 직면하고 수용하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사라 에피소드: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애정관계에서 가질 수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극단적인 조건이 아니고서는 자아를 벗어 어 던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이다. --- 가질수 없는 환상을 계속적으로 추구한 사라는 자기 자신의 꼬리를 잡을려고 빙글빙글 돌았다. --- 완전한 상태를 추구하는 한 사라는 불완전한 느낌을 결코 화해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필이ㅛ했던 것은 그러한 느낌을 탐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바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였다. 그것은 자신의 패턴을 보는데 도움이 되지만 고통을 수용하는 도구로는 명상을 선택하여야 할 것이다. 

바. 자기 자신을 아는 것

 

79쪽

불교는 개개인의 사정이 어떠하든 인간은 모두 핵심적이고 존재론적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고 상정한다. --- 경험의 주체로서 자신을 객체로 안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우리 자신을 주체, 객체로 분리하여 경험할 수 없지만 주체나 객채, 아는자 아는 대상으로 경험해야 한다. --- 리차드 디 마르티노는 "선불교와 정신분석"에서 자아는 자신이 성취하는 것, 자신이 어떤 것과 혼동하게 된다고 기록하였다. 주체로서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은 객체의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80쪽

생각하지 않고 그 상태에 들어간다. 의심에 대한 신념을 연마하라고 종용한다(스테판 베첼러)

 

81쪽

자기에 대한 의심은 불가피한 것이고, 성숙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일이다.의심을 탐구하고 나아가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도피가 아니라 의심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의심에 빠지지 않고 존재하는 구조들을 의도적으로 붕괴하는 것이다. 즉, 붓다는 사성제의 첫째에서 자칫 무시할 수 도 있는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3. 갈애(원인, 버리자, 절망감 인식, 환상, 버리자) : 집

 

83쪽

고통의 발생에 대한 진리, 고통의 원인인 집착, 갈망에 대한 이야기가 두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다. -- 집착은 2가지가 있다. 감각적 쾌락과 나르시스적 갈망이다. 감각적 쾌락은 바로 이해 할 수 있다. 나르시스적 갈망은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망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고정된 자기에 대한 갈망, 안전에 대한 갈망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꿈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하고자 하는 욕구 이면에는 망각의 욕구가 있다. 이것을 붓다는 비존재에 대한 갈망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가. 쾌락원칙

85쪽

쾌락적인 감각 경험을 본질적으로는 유쾌한 것으로 그 자체가 현실원칙의 수립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집착함으로써 궁극적인 만족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세를 경계하는 것이다. --- 두번째 진리는 방출과 포만감을 추구하는데 내재되어 있는 절망감을 인식하게 끔 한다.

 

나. 불확실성

87쪽

붓다는 사변적인 심리학을 설파한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을 불만족에서 자유롭게 하는 실제적인 가르침을 행하였다. "나는 이론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다만 분석할 뿐이다." 붓다는 절대적이고 낭만화된 이상에 집착하거나 허무주의적 방관을 초래할 문제에 관해 일절 답을 주지 않았다. --- 절대적 확실성에 대한 논쟁을 피한 14개의 주제가 있다. 

1.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는가?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는 것도 아닌가?

2. 공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는가?

3. 사후에조 존재하는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도 않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4. 영혼은 육신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단정적인 답을 구하려는 시도는 그릇된 생각으로 이어질 뿐이라고 하였다. --- 삼라망상의 본질에 관한 모든 고정된 가정들에 대해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 말했다. --- 화살을 맞은 자에게 화살 뽑을 생각은 안하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무슨, 무엇으로 만든지.. 등에 대해 알려다가 화살을 뽑지 못하고 죽는다...

 

다. 과대감과 공허감

89쪽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갈망은 서구적 개념에서는 과대감 혹은 공허감으로 불리는 것이다. 갈망은 우리를 불만족감에 빠지게 한다. -- 붓다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도를 권고하였다. 붓다시절에는 상주론자(영원불멸)과 단별론자(무의미함과 헛됨을 믿음)으로 분류되었다. --- 우리는 이러한 견해늘 번갈아 가면서 위안을 얻는다. 다시 말해 거짓 자기의 양 극단에 서 있는 것이다. 칭찬을 위한 과장된 거짓 자아와 외롭고 위축하고 소외되고 불안정한 공허함 자기 모습이 그 양극단이다. 과장된 자기는 외부로부터 상처받기 쉽고 타인의 칭찬에 의존적이면서 스스로를 전지전증하고 자급자족인 존재로 여긴다. 따라서 격리되고 멀어지려는 경향이 있으며 위험을 느낄때는 자신의 힘을 되찾아 줄 만한 이상화된 존재에 집착한다. 공허한 자기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공허감을 달래주는 것에 매달리거나 도망치려고 한다. 그 속에서 스스로 무가치한다는 믿음을 강화하게 된다. --- 사람들은 대게 진정한 자기를 찾으려고 한다. 바차곳타가 붓다에게 요구했듯이 말이다.

 

라. 치료를 위한 시사점

92쪽

자족감과 공허함에서 안식처를 찾고 있는 방식을 탐색할 것이다. 존재와 비존재의 집착중에 거짓 자아가 들어나는 것이고, 이러한 집착을 알때 비로소 해방의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도로시 에피소드: 거짓 자기는 자기 표현을 전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상징화 된다. --- 부모의 요구를 따르느라 자신의 정서생활을 잃어버리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는데 마져도 두려움을 느겼다. --- 주변 사람들에게 비친 도로시는 자신은 공허함과 절망에 빠져 자기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 겉보기에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어떤 감정으로부터 초연했지만, 그녀의 비밀스러운 절망감속에는 공허함의 극단을 볼 수 있었다. ---- 그녀의 감정은 자신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그녀는 몰감정적인 로봇이 되거나 대인관계를 끊고 소외감과 공허함에 빠진 이방인이 되는 것이였다. 그런 모습과 자신과의 동일시를 깨뜨려 나가기 시작했다. -- 붓다는 거짓 자기의 고통은 자족과 공허함의 양극단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집착을 인식할 때 비로소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 도로시는 부모가 요구하는 것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보상적인 자기팽창, 자기 부정의 2가지 방식 중 하나를 통해 스스로를 적응시켰다 다른 사람들로 부터 무시당하는 것은 피했지만, 자신으로부터는 소외되었다. 

 

*재능있는 아이의 드라마 애피소드: 내가 당신 앞에서 슬프고 보채고 화내고 했다면 당신의 사랑은 어디로 갔을까요? 당신이 사랑한 것은 진정 내가 아니고 내가 가장했던 모습아닌가요? 다루기 쉬운아니, 총명하고 공감하기 쉽고 믿음직스러운 아이"

부모님이 칭찬할 때마다 자존감 어린 이미지를 계발해 왔는데,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것을 깨달은 후 느끼는 패닉은 이미지를 산산조각 낸다. 

 

마. 자기에 대한 오해

 

96쪽

정신분석은 이런 결과를 부모의 잘못으로 돌려왔다. 아이들이 과대감과 공허감에서 갈팡징팡하는 것은 부모의 행동(관심을 보였다가 돌어서는 헹동)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 우리는 구하지 않아도 바라는 것이 충족되고 욕구가 마술처럼 채워지기를 원한다. 이러한 바람이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는 정서적 안정에 대한 거부나 위협으로 간주하고 기분이 상해져서 현실을 자기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실망시키는 위협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관심과 공허함으로 도피하게 되는것이다. 

 

★97쪽 중요중요

불교는 나르시시즘에서 자유로워져 깨달음을 얻는 아이로 키우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은 선천적이고, 성숙하게 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거쳐야할 관문이다. -- 거짓된 일관성을 부여하기, 자기 이미지에 도취하기, 어떤 중요한 것이나 하찮은 것들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형서하기, 자신의 실재를 존재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말들기, 이 모두는 정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경향이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확실성에 대한 갈망, 자기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 안전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려는 시도에서 자아는 과장감과 공허감 중 하나를 안식처로 선택하면서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는 것이다. 

 

바. 투명한 마음

 

98쪽

자신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욕망은 붓다시대에서도 강하게 작용해 왔다. --- 없다는 느낌을 어떤 형태의 존재하는 것으로 바꾸지 유지하는 것은 힘들다. (공에 대한 이야기),  자기 안에 어떠한 실체를 가진 작용하는 자가 없다는 가능성에서 자신의 마음을 부합하는 단어로는 나는 동명사다라는 결론의 이야기가 있다. 정신은 동사에서도 명사를 만들려고 한다. 

 

99쪽

불교가 발달함에 따라 이러한 견해를 유지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결국 보편적인 무색의 마음의 개념은 불교의 가르침을 더 쉽게 했고, 다시 자기의 개념을 불교적 사유속에 스며들게 하였다. 능가경에서는 열반은 비어있는 것, 생명력, 정신, 환력, 근원적 실체, 최고의 지복, 구원들의 개졈을 논박하였다. 그런 개념들은 이원론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열반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 진짜 자기라는 이상 버리기

 

99쪽

정신분석은 자기의 껍질을 벗어내는 긴 여정이고, 자기 동일성을 형성하는 복잡한 역동을 드러냈다. 

 

100쪽

불교적 관점에서 깨달은 존재란 자신에게 진짜 자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이다. 깨달은 자는 자신이 없음으로 인해 존재하고, 자기를 이미 부서진 것으로 파악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효과적이고 자발적으로 활동한다. --- 우리가 실재한다는 것을 느끼게 끔 하는 감정의 범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은 그러한 본질의 핵심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이다. --- 서양의 분석가들을 사로잡았던 진짜 자기의 경험은 불교도들이 무아라고 불렀던 것을 진정으로 인식함으로써 가장 직접적으로 도달할 수 있다. -- 공을 꺠달은 자의 행동은 서양에서 매우 발달된 자기 의식을 가진 사람과 닮아 있다. 

 

101쪽

거짓 자기의 붕괴는 거짓 자기의 발현을 인식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지, 진짜에 더 가까움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 자기 표상을 안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매우 편안하다는 것이다. --- 달라이 라마는 진짜 본질을 이해한 사람은 선그라스를 낀 사람으로 비유한다. ---- 이는 극단으로 치우쳐 생각하는 것은 사실, 과장, 공허함, 나르시시즘적인 극단의 속박을 받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4. 해방(실편, 약속) : 멸, 무조건적인 자유

104쪽 

갈망은 집짓는 자를 말한다. 자신의 갈망을 봄으로써 그는 갈망을 제거한다.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치유의 길이다는 붓다의 중심 생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 갈망을 자각함으로써 갈망이 가져올 결과인 태어남과 죽음의 슬픔으로 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 서까래들은 윤회 중심의 뱀과 수탉으로 그려저 있는 탐욕과 분노이다.그 힘이 무너진다고 선언한다. 서까래를 지지나는 마룻대는 고통을 야기하는 정서의 근본원인이다. 즉, 만다라 중심의 검은돼지인 무지를 말한다. 무지란 곧 오해이다. 불교의 언어로 말함현 그것은 사람이나 사물들 속에서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닌 견고한 느낌을 넣는다. 

 

105쪽

붓다는 갈망 때문에 사물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했다. 일시적이고 덧없는 경험이나 감정들은 환원하고, 구체화하고 실체화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기분과 생각에 따라 스스로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스스로를 행복하거나 슬프도록 그저 내버려두지 않고, 행복해야만하고, 슬퍼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무지함의 만성적인 경향으로 존재하지 않는것에서 존재하는 무엇을 창조한다.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실체를 보려고 한다. 

 

106쪽

자기동일성을 구축하는데 사용되는 재료들은 서까래가 무너지는 순간 쓸모없게 된다. 갈망을 똑똑히 확인하고, 탐진치의 제약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몸이 되면 비로소 무조건 자유를 얻는다고 한다. 

 

가. 승화

106쪽

고통의 끝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불만족감은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마음을 통해 무조건적인 자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 고통의 소멸은 갈망의 완전한 사라짐과 소멸이고,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고 자유로워져 끝내는 그로부터 초연해지는 것이다. 갈망을 마주함으로 갈망의 힘을 격리시키고, 그로 부터 해방되어 초연된다는 뜻이다. --- 이와 비슷한 것이 승화이다. ---- 욕망의 통제, 사랑과 증오의 지적 관심으로서의 전환, 탐구의 중요성,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양 ---- 붓다는 본능적일지 몰라도 마음의 본성에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라질 수도, 승화가 중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 이미 부서진

110쪽

나에게 이 잔은 이미 꺠어진 것이요, 나는 그것을 즐긴다오, 나는 이것으로 물을 마시지요. 이것은 물을 잘 담고 있고, 때로는 해를 비추기도 하지요. 두드리면 울리는 소리도 아름답소, 내가 이것을 실수로 깨뜨린다면(바람, 팔꿈치등)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당연히 깨지지라고 생각할 것이요. 그런데 내가 이미 깨졌다고 생각하면 순간 순간이 소중할 것 아니겠소? ---- 우리가 실재하다고 여기고 있는 자기는 이미 부서진 것이다. 

 

다. 수축된 잔재

111쪽

리비도의 원천은 유아와 어머니의 방해 받지 않는 결합 1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부른다. 자아는 어머니와 유아의 복합체 전체를 자기 것으로 여긴다고 프로이드는 말한다. 그후 자아는 자신의 외부 세계를 분리시키면서 한때 속했었떤 더큰 전체의 수축된 잔재(?)로 축소한다. -- 단일체의 느낌은 정신에 계속 존재한다. 애정관계, 자기이해과정 등에서 완전함의 느낌을 재생산하려고 한다.--- 어머니와 유아의 융합적인 에너지는 성장함에 따라 이원화 된다. 그렇게 자아리비도와 대상 리비도가 형성되는 것이다. --- 분석적인 관점에서 자아리비도(꿈, 희망)와 대상리비도(타인이 행복의 열쇠)의 이런 에너지를 좀더 높은 존재의 상태나 수준으로 전환시키려는 진정한 에너지가 승화이다. 

 

112쪽

잃어버린 느낌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창조적인 행위이다. 이런 행위는 자기의식을 일시적이나마 떨칠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예쑬가, 작가, 과학자, 음악가들은 프로이트의 다빈치처럼 창조행위속에 녹아드는 것이다.

 

라. 지혜의 완성

113쪽

정신분석에서 자아리비도와 대상 리비도가 있듯이 불교에서의 2가지 에너지는 지혜와 자비이다. --- 이 두가지 원초적 에너지의 흐름은 높은 수준의 명상에 도달하면 하나로 융합되는데 이는 지혜와 자비의 힘과 언제나 확실히 일치한다. --- 지혜는 자아리비도이고, 자비는 대상리비도가 된다.  --- 자신을 충족시키기도 하고 좌절하시도 한 타인과의 마술같은 결합을 원하는 욕망과 분노는 자비로 전환된다. 

 

마. 소망

114쪽

일차적 사고 과정이란 현실이나 논리, 심지어 우리 자신의 감각적 피드백에 대한 고려도 없이 대상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경향을 말한다. --- 내 나름의 방식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사물의 견고함을 가정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대로 되어주길 원했던 것이다. 

 

* 데이브의 에피소드: 아내가 출산으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는 불완전함을 드러낼때 불안과 공허함을 가졌다. 완전함이 필요했고, 그것이 없다면 그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 이 불안은 불교 스승들이 말한 인간 역경의 핵심이라고 하겠다. 

 

117쪽

이런 불안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그 사람의 이상이 한낱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 뿐이다. 완전함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 써 그러한 불안감은 해소될 수 있다. 

 

바. 무지

118쪽

최초의 만족은 정신 속으로 기억으로 저장된다. 이 기억은 관념으로 저장되어 이후의 삶에서 추구하는 바의 모델이나 도식이 된다. 이 만족감에 대한 기억은 마음속에 구체적인 무엇으로 정립되어 그것과 동일시하거나 재창조하려고 한다. --- 무지는 우리의 잘못된 이해 속에서 은밀히 작용한다. 그리고 어떤 견고함을 기대한다. 견고함을 부여하여 --- 잃어버린 완전함을 구체화되는 자아의 느낌을 기반으로 한다. 

 

119쪽

혜능은 상상은 환상과 같이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명상의 핵심적인 과제는 무의식적이고 소망적인 자기의 개념인 근본적인 갈망을 드러내서 그것들을 환상으로 인식하게 하고, 무지를 떨처내는 자신의 허구적 본질을 드러내는데 있다. 

 

5. 집착할 것이 없음(방법) : 도 

가. 정견

123쪽

혜능의 시는 절대주의와 허무주의를 모두 지지하지 않는 용수의 가르침과 중관학파의 가르침에 일치하고 신수의 시가 가지고 있는 이상화의 함정을 피하고 있다. 혜능은 해탈에 관한 일반적으로 가지는 오해 , 즉 마음은 비어있고, 육체 속에는 정서가 깃들어 있찌 않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있다. --- 없다면 구채어 깨끗하게 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왜 정서를 제거헤야하지?

 

나. 중도

124쪽

중도는 자기 탐닉과 자기 고행의 두극단, 현대적으로 말하면 이상화와 부정을 피하는 길이다. 두가지 모두를 시도해 본 붓다는 양자 모두 고통의 느낌을 발생시키는 나와 내것의 개념을 교모하게 강화한다는 것을 알았다. 감각적 쾌락은 이득될 것이 없는 필부의 길이라고 평가했고, 부정과 고행을 통한 행복 추구는 고통스럽고 가치없어 이득될게 없다고 했다. 자아 경계를 느슨하게 하는 것또한 감정에 자유를 줄 수 없다고 하였다. 붓다는 올바른 접근은 이 두 극단의 사이에 위치한다고 했다. --- 이런 올바른 견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첫째 거짓 자기가 드러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잘못된 견해가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관찰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감정의 본질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혼란이 자아나 자기 같은 핵심적 개념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걸림돌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즉 감정에 대한 오해가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이해가 우리가 감정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 원초적 외침

126쪽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는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 이것은 환상적인 자기가 형성된다.  --- 명상은 자아를 잊는 방법이 아니라 자아를 이용해서 자아 자체의 발현을 관찰하고 길들이기 위한 방법이다. -- 잠재적으로 불안정하다고 할 수 있는 무실체성과 무상의 경험을 통합할 수 있는 유연한 능력을 상정한다. 명상은 자아를 필요로 한다.

라. 결합

128쪽

무아란 어떤 하나됨 융합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 이것은 프로이트의 대양적 감정이라는 개념에서 유래되었다. --- 치료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근심을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근심과 병존하는 법을 찾는 것을 돕는 일이다. 

 

129쪽

조화 융합 자아경계의 소실들은 명상에 존재한다. 하지만 무아의 개념은 아니다.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챙김은 순수한 주의집중으로 변하는 지각 대상을 순간 순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와 관련된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고 우리에게 감정을 경험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수행이 된다. --- 처음에는 집중하는 수행을 통해서만 염감을 받아 왔다. 더 핵심적인 수행이라고 하는 큰 의심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았다. 대양적인 느낌을 강조했지만 정작자기 안에 자기동일성이 없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30쪽 

무아는 우주 혹은 공과 자신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감정이 아니다. 유아기 감정 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어머니와의 합일도 아니다. 무아는 새로운 방식으로 감정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마. 정복

130쪽

정서를 표현하거나 억압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정서는 통제되고 관리되고 억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정서를 야생동물로 인격화하게 한다. 보호받거나 길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 공포는 무아를 정복으로 잘못 이해한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 이상화된 융합 속에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구현하고 싶은 사람으로 보고 싶은 욕구가 매우 강한 것이다.

 

바. 부인

132쪽

다음 오해는 무아는 자아를 넘어선다는 발달 단계라는 믿음이다. --- 이러한 오해는 괴로움을 주는 감정들을 한편으로 밀어 놓거나 그것들이 더 이상 관계가 없는 것 처럼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괴로움 감정들을 통과의례정도로 간주한다. --- 달라이 라마는 무아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이 나중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자기는 한번도 존재한것이 없던 것이다.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언제나..

 

134쪽

무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비어있는 마음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공허에 빠지게 된다. --- 이 경우 자아의 견고함에 대한 믿음만 사라진 것이다. 이것은 붓다의 정견이 아니다. 

 

사. 공

135쪽

공은 본질적으로 사물이 아니며 무엇인가에 대한 신념에 입각해 있다. 사람이나 정서, 사물 내에 자족감이나 실재성이 없다는 것을  공은 우리가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과 개별적 자기 동일성이라는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빠져서 없거나 부족한것으로 설명한다. -- 공은 그 자체로는 무엇도 아니지만 적절한 시야를 유지하게 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공은 절대적인 의미나 아무것도 부여하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한 채 경험으로 내용을 이루는 것과 계속 접촉을 하는 방식이다. 공이 없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공이 있음으로 절망과 과장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 어떤 일에 과도하게 반응하지 않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고, 그 순간 자신을 바로 잡을 수 있기 떄문이다.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정서적 탐닉과 적서적 억압이라는 극단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명상을 함으로써 이러한 대처 전략을 검토하고 대안적 견해를 터득하게 된다. 

 

아. 정서의 수용

136쪽
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공은 구체적인 모습이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 벙어리가 설탕을 맛보는 거에 비핼 수 있다. --- 공은 정서를 둘러썬 잘못된 인식을 인지하고 그로 부터 정서의 경험 방식을 바구는 것을 말한다. ----- 동일시에서 벗어나 공의 이해가 가능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