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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법시대와 신행의 삼계교>

 

불교는 교조인 붓다에게서부터 이지적인 속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인도의 대승불교 역시 초기에는 신앙적인 부분을 강조했디만, 나중에는 이지적인 측면에 경도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특히 중국불교는 경전의 번역으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자를 아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불교가 기본적으로 개인 수행과 연결되는 출가 문화를 바탕으로 구성되다 보니, 민중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점에서 수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에 강북에서 등장한 삼계교는 매우 특이할 만한 민중불교라고 할 수 있다. 삼계교는 정법, 상법, 말법 3단계의 불교적인 시대 구분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불교의 대사회복지 신앙운동이다. 삼계교의 삼계라는 이름도 정법시대가 일계, 상법시대가 이계, 말법시대가 삼계라는 시대 구분에 따라 지금 현재가 삼계라는 것을 뜻하는 표현이다. 정법시대란 붓다의 가르침이 잘 전해지는 때로 붓다 이후 500년간 지속된다고 한다. 상법 시대는 정법 시대와 같지는 않아도 그런 대로 무리 없이 전개되는 시기로 정법 시대 이후 1000년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이후가 말법시대인데, 이때는 전쟁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 대혼란의 시대로 상법시대 후 10000년간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주서이기의 기록에 입각해서, 붓다의 재세 연대를 기원전 1030~949년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신행은 기원전 949년에서 1,500년이 경과한 550년 부터를 말법시대로 규정했다. 수나라가 통일하기 이전이었던 이 시기, 강북이 북주 폐불과 긴 전란을 겪은 혼란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신행의 주장이 민중에게 설득력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을 능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삼계교의 민중적인 타당성과 몰락>

 

신행은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수행이나 불교의 다른 종파에서 말하는 방법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미래불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헌신 봉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보시를 통해 죄업을 소멸할 것을 강조하며 이렇게 모인 재산으로 무진장원을 개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며 구제하였다. 삼계교는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공동체와 같은 집단으로 전란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수당의 통일제국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구호 활동은 국가 체제에 대한 반감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때문에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또한 삼계교를 제외한 모든 종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은 중국불교 내에서도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당의 중기로 들어오면서 삼계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도 공자의 유가와 경쟁하덕 묵가가 있었다. 묵가 역시 개인보다는 집단과 가난한 민중을 위한 행보를 하였다. 그 결과 전란기인 전국 시대에는 유가를 압박할 정도로 유행했지만, 진한 통일제국 시대에 들어오면서 국가의 탄압속에 사라지게 된다. 오늘날에는 종교의 구호활동을 국가가 권장하지만 왕조사회에서는 집권층을 위협하는 행동으로 인식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삼계교는 중국인들이 경험하였던 묵가적인 문제 의식과 요구가 위진남북조의 혼란기에 불교적으로 재발현된 것이라고 하겠다. 

 

<전란시기와 정토사상의 타당성>

 

중국불교의 민중성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정토사상에 입각한 정토종이다. 정토사상은 문제가 많은 현실을 넘어 이상 세계를 찾아가고자 하는 이상세계론이다. 정토란 깨뜻한 땅을 뜻하는 말로, 붓다가 주재하는 불국토를 의미한다. 불교에는 다양한 붓다가 존재하기 떄문에 정토 역시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장소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이므로 일반적 정토=극락이라는 등식으로 이해되는 한다. 정토종은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 발전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당시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란과 관련이 있다. 전쟁은 죽음을 양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때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추모와 남은 사람들의 슬픔을 추슬려 주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수당이라는 통일 제국이 수립되어 전쟁은 멈췄어요 통일과정에서 죽은 이들을 잘 보내주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안정을 꾀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당시에는 삼계교와 관련된 말법 사상도 유행하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정토종은 말법 시대의 가장 쉬운 대안이었다. 이로 인하여 정토종은 당나라 중기까지 꾸준히 발전하여으며, 이후에는 중국 조상 숭배 문화와 결합하면서 전개된다. 

 

<정토종의 흐름과 전개 양상>

 

정토종의 시원을 이루는 인물은 여산 교단에서 결사를 이끈 혜원이다. 정토종이란 특정한 종파라기 보다는 극락정토를 추구하는 중국불교의 한 흐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혜원 이후 정토종과 관련해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북위의 담란(476~)이다. 담란은 도교의 신선술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530년 무렵 북인도 출신의 보리유지를 만나 무량수경을 전해받고 극락정토에 대해서 배운다. 이후 담란은 정토 신앙에 투신하여 일생을 바친다. 저술로 무량수경우파제사원생게주와 약론안락정토의등이 있는데, 아미타불을 집중해서 염송하고 명상하는 방법이 핵심이다. 중국불교에서 아미타불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중심으로 극락에 가는 방법을 체계화한 인물은 담란이 처음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담란을 중국 정토종의 창시자로 보기도 한다. 

 

이후 정토종이 분명한 기틀을 세운 것은 당나라 때의 도작(562~645)와 선도(613~681)라는 사제지간에 의해서였다. 그 중 도작은 오늘날까지 염불하는 방법으로 정착해 있는 칭명염불방식을 제시한 인물이다. 칭명염불은 아미타불의 명호, 즉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 계속 부르면서 생각하는 염불망식이다. 특히 도작은 민중에게 콩을 가지고 염불한 수를 세도록 하는 방법을 권하여 보다 많은 염불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른 소두염불이라고 한다. 이렇게 염불만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도작의 저술로는 안락집이 있다. 도작의 제자인 선도는 담란과 도란을 계승해서 정토종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선도의 저술로는 관무량수경소를 비롯한 5부 9권이 있다. 관무량소경소에서는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 외에도 경전을 독송하거나 아미타불등을 머리속으로 떠올리는 관상등의 방법을 제시해, 정토종의 외연을 넓히고 종합적인 수행을 지양하였다. 선도는 스스로 아미타경을 10만부 필사하고 극락정토의 그림을 300장을 그려 유포하기도 했다. 칭명염불을 중심으로 하는 정토종의 수행은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수행법인 동시에, 민중의 아픔을 함께하고 구원하려 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민중적인 행보이자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후대의 정토종에서는 담란을 정토종의 초조로 놓고 선도를 각각 제2조와 제3조로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