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21(중국-위진남북조). 승조와 도생(반야공사상과 돈오불성설), 진제(추가)
증요중요
소승에서 대승으로 넘어 갈때 여러 논쟁이 있었다. 아라한은 퇴보하는가? 이것은 불완전성에 대한 의문들이였고, 그렇다면 궁극적인 깨달음의 목표, 깨달음의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또한, 특정인만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닌 모두가 부처가 될수 있다는 대승기신론을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성에 대한 돈오와 오염되지 않는 본질에 대한 설명들을 하기 시작했다. 열반경은 불성사상이 핵심으로 돈오를 말하고 있고, 유식은 인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진제는 대승기신론을 번역하였고, 무착의 섭대승론, 중변분별론과 세친의 섭대승론서, 본성론, 아비달마 구사석론를 번역하였다. 진제는 무착계열이고 현장은 유식계열이다. 그 완전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성이다.
5식 - 6식(법, 의식: 상상, 공상, 추상, 망상,,,,) - 7식(무의식을 포함한 자아의식) - 8식(아뢰야식, 집단무의식, 심층의식)
아뢰야식은 깨끗하냐 더럽냐? 허망하냐 물으면, 진망화합식(진제), 물들지 않는다고 하면 구식이 된다.
유식의 핵심은 동시 작동은 안되고, 진여문으로 갈 수 있다. 중생심과 불성
생멸문과 진여문
전식득지 8식을 변혁해서 얻는다. 5식은 성소작지, 6식은 묘관작지 7 평등성지 8은 대원경지
현기담연: 악이 있으니 중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악이 작용되지 않는다. 현실수용이 답이다.
전체과 부분중에 부분만 생각할 수 있어. 이것이 유식, 계가 중요한 이유
변하지 않는 것이 윤회되. 이것은 힌두교가 된다.
불성은 어디에 있나?
진망화합식을 말하면 진제이고, 또다른 것 순수한것을 말하면 9식을 말하게 된다.
진제를 구유식이라고 하고 현장을 신유식이라고 한다.
완전성이 있는데 구름에 가려졌어 구름을 치우면 돼 라고 말하는 것은 동오
미완성인데 점점 좋아지는 것은 100에 가까워지는 것이지 100이 될수는 없다.
유식 = 인식론이 된다.
분석적 관점과, 작용력 관점은 당나라에서 나오게 된다.
진화에서 경쟁력은 적합성에서 나오는 것이 우월은 아니다.
무 無 와 무 无 의 설명
무상과 연기는 불교의 핵심어이다. 무상에 부정적인 것이 심겨지게 되면 불교가 염세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에 갇히게 된다. 도가의 핵심어에는 허와 무가 있다. 허는 기운이 가득하지만 아직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발생론적인 측면을 내포한다. 빅뱅이전과 같은 상태. 이것은 완전히 텅 빈것과는 분명 다르다. 왜냐하면 텅 비었다면 창조적인 측면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뱅이전의 상태와 같은 것이 바로 허이다. 무는 단순이 없다는 것과 다르다. 한문에서는 완전히 없다는 무(無)가아닌 무(无)로 쓴다. 무는 가능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 無 : 있는 게 없는 것(가능성이 없는 것) / 无: 없는 게 없는 것(태초 부터 없던 것)
* 無 : 흔적도 없이 없는 것 / 无: 실제로 있으면서 밖에서 안보이는 것(실제부터 없던 것 처럼, 있는 것 처럼, 절름발이 바지)
오온의 설명
빛은 눈의 잔상을 이용해 연속된 빛처럼 인식되는 것이다. 만화영화 역시 그림들의 빠른 전환으로 부드러운 생명력을 유지한다. 음악도 그렇다. 여러 음계의 소리의 여운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섞이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의 깨달음의 핵심은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지만 현상은 존재한다는 것, 곧 체가 없는 용을 말하는 것이다. --- 그래서 집착없는 마음을 내고, 머묾이 없는 고요속에 계신다. 무상과 무아는 실체가 아닌 변화속의 임시적 존재라는 의미이다.
중도의 설명
중도는 파도타기이다. 우주 안에서 똑같은 조건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파도는 다르다. 파도타기는 작은 보드하나에 의지해서 파도를 탄다. 파도라는 끊임없는 변화속에서 파도를 타는 사람은 그것을 정확히 읽고 파도로 부터 자유롭다. 그것이 중도의 실천자가 변화라는 파도에 빠지지 않으면서 얻게 되는 고요한 행복인 것이다. 중도란 변화속에서 올바른 판단을 유지하는 것이며, 이는 정확한 인식에 기초한다. 현실을 사는데 있어서 시중, 즉 시의적절한 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러한 상황 판단은 곧 적중을 파생하고, 이는 득중으로 귀결된다. 정확한 현실 판단은 내적으로는 고요함. 외적으로는 유효적절한 실천을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에서 중도란 실천의 의미가 된다. 변화라는 연기의 세계속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내외의 실천이 바로 중도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중도를 얻게 되면, 안으로는 번뇌가 미치지 못하고 밖으로는 원망이 따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공
공이라는 용어는 인도문화가 중국문화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정쩡하게 이해된 것이다. 공이란 실체는 없지만 작용은 있다는 말이다. 실체란 변함없는 것을, 그리고 작용이란 변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는 연기나, 무상, 무아의 교리와 맥을 같이 한다.
--- 색은 고정된 실체지만 모든 인간이 그것을 똑같이 인식하지 않는다. 특수한 관계 속에 편차를 수반한다. 특수한 관계를 연기라고 하고 색의 편차에 따른 비규정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나의 판단과 관련된 부분의 정당성은 중도가 된다. ★연기가 현상적이라면 공은 본체적이고, 중도는 실천적인 것이다. 이 세가지는 변화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 불교는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어려운 것이다. 불교는 단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서 정리해 주고 있을 뿐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바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바로보기라고 하겠다.
반조
진리와 하나와어 49일 사유하다. 붓다는 정각이후 자신의 깨달음을 반조한다. 사유와 명상을 통해서 진리의 보편성을 재인식하며 완전히 자기화하는 단계를 거친다. --- 이러한 불교 관점은 해탈향 다음 해탈지견향에서 볼 수 있다
(2018년 불교 예불문 공부하면서 내가 감동적이였던 부분임. 해탈지견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