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불교사(자현 외)

불교사 18(중국). 선

선묘(善妙) 2025. 3. 23. 16:41

 

 

 

 

<개인화의 대두>

 

당은 안정화가 되고 화엄종에 의해서 다민족과 문화의 통합을 성공하면서 세계 최강 제국이 된다. 이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는 말로 바뀌게 된다. 경제적 안정은 문화수준을 높이는 배경이 되며 점점 집단적인 사고에서 개인적인 사고로 개인화가 되어 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화두는 개인의 행복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것으로 객관적인 기준이나 판단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병상이나 심리상담과 같은 주관을 바꾸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다. 당나라의 개인화의 꽃으로 대두된것이 바로 주관적인 마음의 수행 문화인 선종이다. 선종은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개별의 가치를 손상하지 않는 통합의 가치 위헤서 전개되는 중국적인 관점에 의한 불교식 수행론이다. 이는 당시의 개인화에 대한 요구와 맞아떨어지면서 일거에 중국 사상계의 판도를 뒤바꾸게 한다. 

 

강북의 관중 문화는 집단적인 성격이 강하다. 개인과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강남이다. 강남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지만 문화는 강북보다 떨어지고 있었고 한족의 본토가 아니라는 점에서 강북보다 차별받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6조 시대를 거치면서 강북이 유목 준화에 의해 재단되었지만 강남은 한족들에 의해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강남 문화가 강북 문화를 역전하게 된다. 이것을 우리는 육조시대의 예술발달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강북의 강남에 대한 차별은 성당시기까지도 유전된다. 이를 단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선종의 완성자인 육조혜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육조단경에는 강남 관둥인인 혜능이 기주 쌍봉산의 오조 홍인을 찾아갔을 때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너는 영남인으로 오랑캐인데 어찌 감히 붓다가 될 수 있는가?" 그러자 혜능은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게는 남북이 있을 수 없다."라고 대답한다. 이 대화는 강남인에 대한 차별정서가 혜능에게도 있었고, 홍인에게 말대답하는 개인성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늘날도 행자가 큰 스님을 친견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말대답은 용납이 되지 않는다. 이는 고압적인 강북문화와 개인화된 강남 문화를 잘 대변해준다.

 

선종이 오조 홍인에 의해 상당히 번성했음에도 강남인인 혜능을 기다려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은 강남의 개인문화가 선종과 잘 맞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선존은 혜능쪽인 남종선의 기록과는 달리 주류는 장안과 낙양에서 활약한 북종선 계열이였다. 그러나 당현종 때 안사의 난을 겪으면서 강북은 전쟁에 휘말리게 되고, 강남이 경제력과 문화력이 강북을 앞서게 된다. 이때 남종선은 북종선을 누르고 선종의 주류가 되는 것이다. 이 시기에 활약한 인물이 바로 하택신회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강남의 개인주의가 아니라면 돈오라는 철저한 주관주의적인 관점 환기의 꺠달음이 불가능하다는 측면 역시 작용했다고 하겠다. 

 

<불성의 재발견>

 

혜능의 인간본성에 대한 재발견 즉 견성사상은 소위 육조혁명이라고 한다. 견성은 견불성의 준말이다. 그 뜻은 우리 모두 본래 부터 붓다를 내포하고 있으니 이를 자각하기만 하면 곧 붓다가 된다는 것이다. 불성은 인도 불교에서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의미인 여래장을 주로 사용한다. 여래장이란 붓다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세 윤회를 믿는 인도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미래에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발심하면 언젠가는 붓다가 된다느 논리이다. 미래에 붓다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씨앗속에 나무의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 처럼 말이다.이 것을 여래의 가능성 즉, 여래장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국은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을 주장하며 삼세가 아닌 현세만 인정한다. 이렇게 되면 미래의 어느 생에 붓다가 되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또 붓다라는 완전성이 미래에 존재한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지금도 존재한다는 것이 된다. 일반적인 상대 체계적인 조건에서의 가능성과 완정한 완성은 논리적 층위가 다른다. 아이에게 어른의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아이가 곧 어른은 아니다. 붓다와 같은 완전체의 경우 가능성성은 곧 완성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오나전한 것은 불완전이 변화되어 성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완성이란 현재에도 완성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붓다는 완전한 존재이기에 기래의 가능성이 현재에 존재한다는 것은 현재에도 붓다여만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현재 붓다의 존재가 가능성의 측면일지라도 현재 내재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지금의 현실태여야만 한다. 그리고 지금 아니면 불완전한 존재는 어떠한 조건이 경과해서도 완전한 존재가 될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붓다가 될 수 없다. 이는 유한이 아무리 증대되어도 무한이 될수 없고 무한은 아무리 나뉘어도 유한이 될 수 없는 이치 때문이다. 중생이 미래의 붓다가 된다는 것은 불교의 종교적인 관점의 주장으로 이는 믿음의 영역이 된다. 대승불교는 이를 대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이 대전제를 수용하는 대승불교 안에서 이것은 무조건 적인 참이 된다. 이는 연역 논리에서 대전제가 참이면 결과가 참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 중국철학에는 불교 전부터 존재하던 인성론과 관련된 성선설 주장이 있다. 이는 불성이라는 측면과 본질적인 선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왜냐하면 붓다가 불교에서 완전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국 불교에서 여래장이 불성으로 번역되는 것이 중국의 인성론적 배경에 그 이유가 있다. 성이라는 한자는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적 속성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불성은 수행을 통해 확보된 것이 아니라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완성된 가치이기 때문에 관점의 환기를 통해 이해하면 끝나는 문제가 된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지 눈동자 자체는 문제가 없다. 그러니 눈을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혜능의 돈오가 된다. 이것이 육조 혁명의 견성성불의 의미이며 그것은 인간 본성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육조혁명이라고 까지하는 이유는 본질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는 역발상적인 인식 사고 때문이다. 이는 일원론적 중국 철학의 특질과 맞아져 일상의 재발견으로 연결된다.

 

<선의 미학>

 

깨달음의 방식 문제에서 돈오와 점수의 문제는 관점의 환기를 통한 실존에 대한 재인식, 혜능계 돈오설의 승리로 끝이 난다. 즉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가치에 의한 자각의 재발견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후 비대해진 혜능계안에서 돈오 후의 수행문제인 돈수와 점수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소외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의 논쟁인 것이다. 이 논리는 돈오라는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면 그 이후라는 부분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돈오 그 자체는 어떠한 경우에도 수행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돈오에는 수행이 붙을 곳이 없다. 이것이 돈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므로 돈오점수라는 개념은 돈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기인하는 사고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것은 돈오라는 관점 환기가 이루어진 뒤에도 현상적인 변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관점이 바뀌어도 우리의 인식에서는 태양이 뜨고 지는 것과 지구가 돌지 않는 다는 말이 된다. 즉 이해와 현실적인 인식이 다를 수 있는 부분에서 돈오 이후의 수행의 문제가 촉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라는 개념이 본래부터 문제가 없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돈오점수의 논리는 어떻게도 성립할 수 없다. 이 문제는 꿈속에서  꿈이라는 것을 자각했는데 왜 꿈에서 깨지 않느냐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원론인 중국문화에서는 꿈이라는 자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깸을 통한 또 다른 세계로의 전환은 존재하지 않는다. 꿈을 자각해서 깬다는 것은 인도의 이원론 배경에 존재하는 것이지 중국관점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종은 이 문제를 현실 긍정의 관점으로 해소하고자 한다. 즉 현실은  꿈과 같이 헛된 것이지만 부정의 대상이 아닌 대긍정의 유희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평상심>

 

일원론의 꺠달음은 현상적인 현실과 결코 유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실의 관점 환기를 통한 대긍정으로의 전환, 이것이 깨달음이 된다. 그래서 평상심이 진리일 뿐이라는 평상심시도와 같은 논리가 전개되는것이다. 그러나 평상심이 도라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나 얻지 않는 것에 대한 현상적인 차이가 없게 된다. 그렇지만 양자 사이에는 주체적 자각이라는 차이가 있다. 마치 꿈을 모르면서  꿈을 꾸는 사람은 꿈속 현실에 따른 속박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꿈임을 자각하게 되면 속박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과 같다. 즉 현상적인 차이가 아니라 이해에 따른 인식적인 자율성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이다. 일원에서는 깬다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현상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측면이 발생하는 것이다. 현실 긍정론은 중국철학의 기본 배경으로 상고주의나 역사주의와 같은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려고 하는 정신과 권력의 성취의지와도 연관된다. 이런 점에서 중국 불교는 자각을 통해서 깨어난다는 인도 불교의 비역사주의적 관점과는 큰 차이를 가진다.

 

<현실 긍정과 행동주의>

 

현실이 곧 깨달음일 뿐이라는 현실에 대한 긍정은 행동주의를 파생하게 된다. 현실 자체가 깨달음인 상황에서는 현재를 사는 것 이상의 수행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깨달음을 펼치는 것이기도 하다. 수파니파타에서는 붓다는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명상에 잠겨있다는 초월명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원론의 선종에서는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면 깨달음이 아니다. 그리하여 선종은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차등의 논리를 전개한다. 종교란 인간의 행복 추구와 관련된 기호라는 점에서 하나의 정답을 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가 될 수 있다. 선종의 깨어있음은 일원론 상태에서 순환론을 전개하는 중국 철학에서는 필연적적인 귀결이 된다. 그래서 깨달음은 변화라는 작용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작용시성과 전체작용의 논리를 파생하게 된다. 즉, 전체가 활발발(늘 생생하게 살아있음)한 경계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든 동정의 가치는 모두 다 깨달음의 군상이자 그 현시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선종의 현실 대 긍정과 변화를 깨달음으로 수용하는 관점은 '굳이 출가할 필요가 있나?'라는 신유학의 반론에 직면하게 된다. 이 문제로 후일 동아시아 중구 문화권에서 불교가 2선으로 물러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선종은 이를 적절히 변증하지 못했다. 선종은 주관에 의한 미학적 시각을 통해야 할 것을 일반화와 혼동하게 됨으로 결국 적절한 해법 도출에 실패하였다. 

 

자각은 주관에 의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선종은 주관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사실에 대한 객관의 문제는 없고 그러한 사실을 수용하는 주관의 문제가 초점인 것이다. 이렇기에 인간은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주관의 매몰에 따라 발생한 사회와의 관계, 윤리학의 성립 근거가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마치 꿈을 꿈이라고 자각하게 되면 나의 인식에 대한 상대적인 측면에 없기 때문에 윤리적 근거가 상실된다. 이것은 이후 신유학에서 선종을 비판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선종은 철저히 개인의 주관주의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철학을 넘어 선 미학의 영역에 있다. 마학적 판단에는 기준이 없다. 이것은 선종의 윤리 문제를 해소하는 해법이 된다. 그러나 후일 송나라(집단주의)에서 개인화는 설득력이 적어진다. 이것이 선종이 신유학에 밀려나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날은 개인화 사회에서는 큰 장점이 된다. 스스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규칙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개인화를 통한 집단의 존속이다.그러나 당시 선종은 중세라는 사회발달 한계속에서 이러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했고, 이는 신유학적인 비판을 극복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279쪽

 

개인주의가 사회보다 개인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면, 종교적 이기주의는 종교를 통해 자신과 가족들이 더 특수화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 특정 종교의식을 통해 그 사람은 좀 더 강한 가피라는 에너지를 통해 특화된다. 또 종교적인 신성한 보호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당사자에게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반대의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282쪽

대승불교가 보편적인 붓다화, 선종은 주관중심이 깨어남, 밀교는 소수를 통한 특화를 말한다.

 --- 진언은 인도적인 관점에서 언어에 대한 신뢰문화에 기인, 중국은 문자보다는 기호에 대한 신뢰가 높음(상징), 그 기호의 주술성이 바로 부적이다. 밀교는 관상을 동반한다. 관상은 특정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달이라고 하면 달을 떠올리는 형상이 관상이다. 관상은 무더위와 공간성을 중시하는 인도문화이다. 그러므로 시간 중심인 중국과는 다른 가치이다.--- 붓다가 된 나는 붓다의 눈으로 세계를 관조한다. 이때 완전히 조화롭고 긍정적인 이데아의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 밀교로 오게 되면 인도 불교의 치안과 피안의 구조가 사라진다. 고통속의 차안이 곧 관점의 환기에 의해 그래도 피안으로 깨어나게 된다는 인식이 수립된다. 이 결과 도출은 인도 불교의 꽃이라고 말한다. 붓다가 된 인간은 자비의 화현으로 걸음마다 거룩하고 몸짓다가 성스러워지는 삶을 하는 것이다. 

 

이제 비해 선종은 나를 바꿔 붓다가 되지않고, 붓다를 바꿔 내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기 본연의 당당함이다. 그것이 바로 선어가 된다.(내가 붓다다! )  밀교의 번잡합과는 반대로 단도직입의 존재가 선종이라는 점은 인도 문화과 중국 문화의 차이를 보여 준다. 단순 명료함으로 화려함을 굴복시키는 가치 그것이 선종에 있다. 그것이 선의 미학인 것이다.                                                                                                                                                                                                                   

286쪽

인도 불교의 중국진출로 중국 불교가 성립된 후 계속해서 자극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인도적인 사고의 인도 불교였다. 인도 불교에 의한 외부적인 충격과 중국 불교적인 변형이 중국 불교의 발전 형태였다. 하지만 본토의 경기 둔화는 중국 불교의 발전에 자극을 주지 못한다. 

 

288쪽 

회창난법 이후 불교는 치명상을 입는다. 경전이 없어 고려에서 경전을 구하게 되었고, 교리 중심의 교종의 피해는 컸다. 선생들도 대규모 숙청되어 책이 있어도 공부를 못하게 된것이다. 이는 불교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 내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 이에 비해 선종은 관전 전환이라는 명상주의를 택하고 있어서 산에 들어가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유목민화) 사원도 없고, 사회적인 경제 지원이 없어지자 불교는 교종이 아닌 선종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것이 선종의 실질적인 독주 체제가 갖추게 되는것이다.  선종은 교종의 체제 안정과 교리적인 번쇄함을 비판하면서 인식론적 전회를 통한 일상의 재발견을 제창한 종파이다.  --- 선불교 중심은 전체적인 하향화와 선종의 비윤리성이 표면화 된다.  이후  인도 불교의 외부의 자극이 줄고, 회창법난을 통한 내부적인 파괴는 중국 불교의 몰락을 가져오고 유교가 불교를 거치면서 재정비되는 신유학에 의해서 불교는 점차 비판받게 된다.

 

293쪽

불교는 개인 순환론과 상업을 바탕으로 전개 되고, 유교는 집단주의와 농업 문화로 낮은 경제력과 서민적인 보편성을 우선시 한다. 농업 왕조들은 경제력 부족, 군사력 부족으로 고급 문화가 쇠퇴하게 된다.   또한 농업은 노동력을 중시하기 때문에 출가를 꺼린게 된다. 또한 농업주의는 단순 반복적인 생계로 순박하여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고, 땅 중심이기 때문에 관리가 쉽고 순종적이고 충심이 강하다는 측면이 있다. 상인들은 이익을 위해 머리를 쓰고 의리를 진다는 점, 주거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에서 통제가 어렵다.

 

295쪽

원래 당나라의 선은 말이나 의표를 찌르는 행동을 통해 즉각적으로 상대의 관점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율성은 강함과 유염함이 공존하는 고등한 문화적 가치이다. ---- 개그는 원숙함의 여유인 것이다.   --- 그러나 회창폐불 이후  불교의 질적인 저하와 한족 문화의 폐쇄성은 선종의 정신을 제도적인 방식으로 수정하면 안되었다. 그때 등장하게 되는것이 대혜 종고의 간화선이다. 이를 통해 선종은 파격적인 형식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대혜의 간화선은 화두 즉 일반적인 사고 판단이 안되는 모순 명제를 가지고 계속 집중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강한 집중은 전환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깨달음을 언게 된다. 마치 석탄에 고도의 압력을 가해서 다야몬드로 만드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선은 말과 행동을 생각의 틀을 깨고 관점을 환기시키는 것이지 앉아서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전하는 일화가 마조도일과 남악회양이다. (기왓장을 갈아서 거울을 만든다. 좌선한다고 붓다가 되냐?)

 

돈오라는 깨달음의 방식에는 어떤 방향에서도 수행이 붙을 수 없다. 관점의 환기는 인식의 전환이지 수행의 결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송나라 때 이런 당나라에서 부정된 방식이 선종의 본류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은 불교가 퇴보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의 방식은 활력을 주지 못했다. 대혜종고는 사회적 변화와 가치관의 혼란에서 선을 체계화하여 선종을 구하고 부활시켰지만 이것에 의해 선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선종은 다시 2선으로 물러 앉게 된다. 

 

297쪽 

북송은 불교의 사상계가 장악이 점차 약화되는 시기로, 신유학의 토대가 다져지며 도교가 유행하게 된다. ---- 성리학에는 명분론과 배타 정신이 가득하다(나는 바르지만 힘이 없을 뿐의 정의론) --- 주자는 오랑캐인 금나라를 정의로운 남송이 못이기는 가에 대해 오랑캐 문화의 중국 유입이라고 말한다. 이것에 의해 불교가 비판하게 된다. 육조시대 남조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상황에서 죽림칠현과 같은 현실도피를 선택했다. 주자는 남탓으로 돌리고 있다. 하지만 둘다 방어기제라는 점은 동일하다. 관점만 다르지 본질은 같다는 말이다. 이러한 성리학의 관점은 당쟁만 초래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300쪽

선은 철학보다는 실전적인 미학이다. 그러므로 신유학의 철학성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하다.  ---- 신유교는 유교라는 정치철학 중심의 종교화이다. 수양론 중심의 신유교가 종교철학이 되어 버린다. 이는 정치를 지향함녀서 수신을 강조하는 모순적인 문화가 나온것이다. 예로 퇴계가 도산 서원에 있으면서 정국에 간여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렇다. 산림에 은거하며 고결한 듯 하지만 뒤에서 조정하는 이율배반적인 구조가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정치에도 재앙이고 종교에도 재앙이 된다. -- 중국의 관리 임용의 과거제에는 유교가 잡고 있었고, 그 사서의 주석을 주자가 달았기에 신유학은 성공하게 된다. ----  남송의 주자는 북송오자의 사상을 집대성하게 된다. 이를 주자학이라고도 하고 성리학이라도 한다. --- 심학은 명나라 왕양명을 그쳐 심리학, 양명학이라도 한다. 신유학은 이렇게 성과 심의 차이에 의해 성리학과 심리학으로 갈리게 된다. 중국 불교는 본성과 마음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신유학을 이를 구분하여 성과 심의 차이를 부각한다. 성은 마음안의 본질이고, 심은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논리적 층위가 다르다. 즉 인간의 본질이 핵심을 보면 성리학, 포괄적인 관점에서 보면 양명학이다. 

 

 

305쪽

성즉리를 통한 구현이 성리학이다. 성즉리란 인간의 마음안의 본성과 외부의 천리를 곧 같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화엄종에서 말하는 심즉불이나 선종의 견성즉불과 논리적으로 매우 유사한 구조가 된다. 이러한 중국 불교의 문제의식은 중국 철학의 천과 인간의 심성과의 관계인 인성론을 이어 받음이다. 이것은 중국철학의 인성론이 제자 박개의 인성론과 중국 불교를 거쳐 신유학으로 유전하면서 중국상을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결합을 중국철학에서는 천일합이라고 한다.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철학의 분류는 인성론이며 그 목적은 천인합일이라것을 알게 된다. 결국 중국 불교는 유교를 누르고, 성리학은 불교를 공격했지만 이들은 모두 인성론이라는 하나의 사슬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다른 것은 붓다와 합일이나 천과 합일이냐의 차이이다. 이러한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불교는 종교이고 유교는 현실위주이기 때문이다.  

 

화엄종의 세계관에서 확인되는 사사무애와 같은 측면은 현실에 대한 철학적 인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또 선종의 평상심이 도라는 일상의 재발견이라는 주장은 왜 평범함 삶을 살지 않는가? 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가정생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사실 중국 불교에서 살펴지는 현실긍정의 논리 구조에서 이러한 신유학의 비판을 반박하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신유교는 홈경기의 이점을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 비판하는 중국 불교는 선종이다. 선종의 비사회적인 개인화와 자율성이 문제라는 것이다. 성리학은 모든 것을 제대화 하고 규격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의 심성적인 가치도 포함된다. --- 성리학의 전체적인 질서에 좀 더 치중하고 있다고 하는 점은 화엄종 세계관과 유사하다. 화엄종의 세계관 제시와 이를 넘어선 개인화이 선종, , 그리고 다시 개인화의 비규정성이 문제가 되자 전체 질서의 성리학이 대두되는 것이다. 다시 세계가 안정되면 다시 개인화가 강조되고 이러한 흐름속에 등장하는것이 양명학이다. 즉 화엄종-선종-성리학-양명학의 순환인 것이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화엄종과 성리학 선종과 양명학의 유사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이 구조를 끌어 올리면 맹자와 순자의 대립적 구조와 만나게 된다. 순자- 화엄학- 성리학이 한축이 되고, 맹자- 선종-양명학이 한축이 된다. 이는 집단과 개인 그리고 보수와 개혁이라는 인간에게 내재된 두 부류의 요구에 각기 부응한 것이다. 

 

 

308쪽

남송시대에 성리학이 주자에 의해 완성될 떼, 사상적인 경쟁자가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육상산이다. 육상산은 우주가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우주다. 유교의 경전은 모두 내마음의 각주라고 한 철저한 유심론자이고 주관주의자이다. 그러나 마음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꺼렸기 때문에 당대에 주자와 같이 하나의 학문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리서 심리학은 명의 왕양명에 의해서 완성된다. 주자와 육상산이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점은 남송시대가 변화를 요구했다는 뜻이다. 주자의 성리학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당시의 요구가 주자적인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양명학은 본마음의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주관적인 선종과 유사하다. 그래서 성리학자들에게 유교 옷을 입은 선종의 변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즉리는 돈오와 같은 것으로 현실 긍정과 행동주의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왕양명은 지행합일이라고 해서 아는것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했다. 선종과 다른 점은 입세를 말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신유교는 인간을 좀 더 특수화한다는 점이 있다. 대승불교는 불육식을 주장하지만 유교는 살생은 어짊이 아니니 꺼린다고 제한하는 정도이다. 신유교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지만 유교인것이고, 중국불교는 중국 철학을 입지만 역시 불교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