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불교사(자현 외)

불교사 17(중국). 인성론과 수(천태종), 당(화엄종)

선묘(善妙) 2025. 3. 23. 11:26

<인성론>

 

인도 문화는 전통적으로 신을 믿던 상황에서 축의 시대를 거쳐 불교와 같은 인간 중심 이성주의로 변모한다. 그러나 상업주의의 몰락으로 인하여 신 중심 힌두교로 관점을 전환시키게 된다. 즉 인도는 신-인간-신의 구조를 보이게 된다. 그리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은 전통적인 신중심에서 헬레니즘의 이성주의로 그리고 다시 중세의 헤브리즘으로 전홚된다. 이것이 르네상스라는 신-인간-신-인간의 구조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중국문화는 은나라때 신정정치를 통해 절실하게 하나님을 믿던 구조가 점차 약화되다가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인간 중심의 이성주의로 변모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는 신을 믿지 않는다. 즉 신-인간의 단순 구조로 오늘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이러나 보니 인간의 본성에 대산 탐구가 중국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된다. 인도나 유럽과는 달리 신이 건재한 상태에서 인간이 주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은 거의 신의 가치를 박락된다. 이 떄문에 인간 안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하므로 인간에 대한 논의가 깊이 있게 다뤄지게 된다.

 

은나라때에는 모든 중요한 사안은 신에게 물어서 신의 뜻을 살핀 후에 처리했다. 신에게 묻는 도구가 갑골 즉 귀갑수골이다. 그러나 은나라와 주나라의 교체기 때 강태공 강상은 합리적인 이성의 관점으로 신에 의탁했떤 은나라의 마지막 제인주를 토벌하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중국 역사에 있어서 신의 아성이 무너지는 일이다(동전). 이후 춘추시대게 오면서 제후국들은 치열한 전략에 의한 승부를 펼치게 되고 이때 신의 입지는 점차 약화된다. 전쟁이라는 특성상 신을 믿거나 정의롭다고 해서 이기는 것은 안다. 송양지인의 고사로 널리 알려진 송나라 양공의 어짊은 결국 패배와 죽음이라는 대가만 지불할 뿐이다. 전국시대 신의 무가치성이 제기되면서 필연적으로 인간의 본성 문제가 제일 큰 화두로 대두하게 된다. 중국의 인성론은 보편적으로 성선론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순자는 성악설이라는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질적인 성선에 입각한 제한적인 성악을 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중국철학에서 본질적인 성악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진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상략: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전략

 중략: 권모술수와 임기응변

 하략: 하지말아야 할 책략

 송나라 양공: 인덕 과잉, 어리석은 베품

 

중국 철학이 성선론 일변으로 전개되는 것은 하늘이라는 오나전하고 지선인 존재가 인선에게 본성을 부여했다는 생각 떄문이다. 중국철학에서 천과 성과 관계는 인도철학의 범아일여 관점과 유사하다. 다만 인도가 범과 아중 범이라는 신 중심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중궁는 천과 성 중 성 중심의 관점을 취한다. 중국 철학에서 천은 처음 기독교의 여호와와 같은 인격적 존재였으나, 점차 인격적인 요소가 탈각되면서 인격천은 원리, 이치와 같은 의리천, 천리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천리가 인간에 내포된 것이 바로 성이다. 천에 인격적적인 요소가 아닌 천리라는 법칙적 측면만 존재한다는 점은 인간 이성을 통한 원리 파악에 중국철학이 더 치중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중국철학에서의 목적은 천리와 연결된 성의 본질을 이해하거나 또는 이를 확충시켜 천리와 합일되는 것이다. 이것은 천인합일이라고 한다. 이는 중국철학의 범주에 속하는 유교나 도교 그리고 중국중교를 통해서 공통되게 나타난다. 물론 도교나 중국 불교에서는 합치의 대상이 유교적인 천이 아니라 도나 허 또는 불이 되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그 구조적인 면에서는 대동소이 하다.

 

<인성론의 발전>

 

춘추시대부터 시작된 천의 인격적인 탈각과 이러한 공백을 채우게 되는 합리적 인간 본성에 대한 자각은 논어에서 제일 먼저 확인 된다. 논어 양화 편에는 "성상근야 습상원야"라고 해서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서로 달라진다"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은 이때까지만 해도 인성론적인 가치가 점차 대두되는 정도이지, 아직은 핵심저인 위치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타내준다. 전국시대로 넘어가면서 더욱 치열한 전쟁 양상을 버리며 이와 과련해서 인간의 이성적이 능력은 더 크게 요구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신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되고, 드디어 인성론이 중국철학의 주류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이다. 그러나 그외에도 당시 세석, 밀자천, 칠조개, 공손니자, 고자등이 모두 인성론에 대해 말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이는 전국시대 중국 철학의 가장 큰 화두가 인성론이었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 또 그 이유는 인격천의 급격한 몰락과 이에 대한 대안적인 요구가 존재하고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성론에 대한 논의는 결말을 보지 못하고 진의 통일을 넘어 한나라에 까지 넘어가게 된다. 한나라의 인성론은 순자의 후예인 순열에 의해서 시작된다. 한무제때 대학자 동중서는 여러 인성론을 제기하게 되는데, 이 중 성삼품설이 제일 중요하다. 이외에도 한나라 초기 유향의 성장상응론이나 후한시대 왕충의 용기위성설 등이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한 논의들 역시 모두 답을 내지 못하고 유교의 쇠퇴와 더물어 인성론에 대한 관심도 낮아지게 된다. 이러다가 위진남북조 시대가 전개되면서 중국은 최초의 이민족 지배와 외래사상이 만개되는 불교를 맞이하게 된다. 

 

 

 

 

불교는 처음에는 신통과 같은 신이 영웅으로 중국인들에게 주목되면서 감명을 주게 된다. 언어와 문화권적인 차이에 의해 문자가 잘 소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신통은 분명 쉽게 다가가서 감응시키기에 유리한 조건임에는 틀림없다. 데이비드 카퍼필드가 일거에 전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마술이라는 언어나 문자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국 불교의 정착과 관련해서 데이비드 카퍼필드와 같은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불도징이였다. 불도징은 마술이 아닌 신통을 사용햇다. 그러나 불교가 점차 중국에 정착되고 안정되면서 중국인의 관심에 맞는 부분들이 부각되기 시작된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전통적인 인성론과 관련된 불성 사상과 유심주의이다. 후일 불교는 중국적인 문제의식을 통해 중국 불교로 거듭나게 된다. 중국 불교를 소위 사가대승이라고 하여 천태종, 화엄종, 선종, 정토종을 일컫는다. 그런데 이 중 신앙적인 정토종을 제외한 나머지 3가지 중국 불교는 모두 불성과 유심사상을 주요 종지로 삼고 있다. 불성과 유심은 모두 인성론과 관련된다. 즉, 중국 철학의 단절된 인성론은 유교를 넘어서 불교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 유교: 성과 악은 섞여있다.

  도가 : 성초선악론 성은 선악을 넘어선 것이다. 선은 그릇이니 선과 악을 담을 뿐이다.

  맹자: 성선설(유지입정), 고자를 반박함. 물은 거슬러 가지 않는다. 우산지목

            창조설(신은 실수는 안하잖아), 연역논리는 단 한명이라도 아닌 사람이 아니면 대전제는 거짓이 된다.

  고자: 무지 성선무악설(로크)

  순자: 성악설(성악설도 성선설이다)

 

이러한 인성론의 논리 구조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역작이 바로 진제의 대승기신론(찬불승 마명이 썼다는 주장 존재)이다. 이책은 불교를 넘어서 중국 철학 전반에 걸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대한 명저이다. 대승기신론의 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으나, 이 책은 인도와 중국문화에 모두 정통한 불교학자에 의해 저술된 것이다. 또 내용중에는 왜곡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정신이 엿 보인다. 이 시기의 중국불교에서 이런 인물은 진제밖에 없다. 그러므로 진제를 저자로 보아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공자와 맹자를 병칭하여 공맹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맹자는 전국시대 말의 학자인 순자에 물려서 역사의 표면에서 곧 사라진 인문이다. 그러나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불교의 인성론 체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찾는 과정에서 맹자가 재평가받기 이른다. 즉 맹자를 깨워서 성인으로 만든 것은 유교가 아니라 불교인이다. 북송시대의 신유학자 정명도가 죽자 정이천은 맹자 이래로 끊어진 심법을 1400년을 격해서 정명도가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00, 200년도 아닌 1400년이라는 긴 시간을 뛰어넘어 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이 인성론의 공백을 채운 것이 유교가 아닌 불교이다. 그리고 중국 불교의 인성론적인 세계를 통해 유교는 신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중국의 3세력>

 

중국은 크게 유목군사력, 관중의 정치력(농경문화), 문화력, 강남의 풍료로운 물산에 의한 경제력(양쯔강 남쪽 물중심)으로 구분한다. --- 유목민의 전투적인 우월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서구의 전쟁사에서 "유목민의 기마병은 독일에서 탱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최강이었다"는 기술이 있다. 관중은 강수략이 적어 논농사가 안된다. 그래서 중국은 논을 뜻하는 한자가 없다. 풍족하지 않는 수확물은 경제 다툼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예론이고 정치가 되는 것이다. 또 적은 것을 서로 나눠 가지다 보니 투쟁이 발생하게 되고 이러한 가운데 문화가 발전한다. 그래서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의 같은 위도에 나라들이 문화적으로 강해지게 되는 것이다. 강남은 유약하다. 풍요로움의 경제력과 관련된 느긋함과 양보의 태도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곽중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과, 3지역을 융합한 중국이 있다. 중국은 3지역이 융합횔때 비로소 로마를 제압하는 세계 최강의 중국으로 세계사에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사에서는 3지역이 합쳐지는 수당을 세계 제국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은 만리장성과 대운하가 큰 국책 사업이다. 만리장성은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수양제의 대운하는 위대한 사업으로 꼽힌다. 대운하는 남방의 경제력을 북방으로 끌어들이고 강남과 강북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양제가 처음 운하를 건설하려고 계획한 것은 황제의 배인 용선을 띄우고 강남으로 뱃놀이를 가기 위함이라고 전한다. 대운하는 중국이 발전하는데 우리나라의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고, 3지역을 결속 시켜 하나의 중국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점에서 위대한 국책 사업이였다. 

 

북조와 남조의 대치는 370여년이라는 장기간에 이뤄진다. 유목인들은 안정적인 제국을 건설해 본 경험이 업어서 여러 왕조가 명멸하게 되어 남쪽으로 내려 올 수 가 없었고,  유목지역과 북방만으로도 충분히 넓었다는 점과 유목민들은 큰물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서 넘어서기 어렵다는 점이다.  결국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북제의 선양을 받아 문제가 건국한 수나라에 의해서 통일된다. 문제는 한족화된 유목민 계통이로 북조에 의한 통일이였다. 또한 다수의 전쟁 포로들을 근로 시켜야 했기 때문에 수문제에 이어 수양제가 양자강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를 만들게 된다. 대운하는 남으로는 항주인근의 여향에서 시작해서 서로는 수도였던 장안, 북으로는 북경 옆의 탁군을 연결하는 대역사였다. 말그대로 중국의 세로의 대동맥이 만들어졌다. 이로서 중국은 지역적으로 하나의 중국이라는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지리적 완성 뒤에는 각기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거대 중국이 어떻게 하나로 융합할 것인가로 문제가 옮겨진다. 이 시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사상은 바로 불교 밖에 없다. 그렇게 대두된것이 바로 수나라의 천태종이다. 

 

<수나라와 천태종>

 

왕조가 오랫동안 분열되면 상인의 자본 요구에 의해서 통일의 방향으로 가게 된다. 상업은 직접적인 권련은 없지만 상업은 보이지 않는 손이며, 이시기 보이는 손의 역할은 관중의 농우 지역의 정치 세력인 관롱집단이였다. 이 시회를 잡게 된 것이 바로 수나라이다. 그러나 수양제의 대운하 걸설과 고구려 정벌등의 독주와 과도한 세금 부과는 상인 자본의 지지를 철회하게 되고, 결국 수나라는 재분열하게 되면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수나라의 지배 이념은 천태종이다. 천태종은 도교적인 측면과 결합된 불교로 이전까지의 각 종파적인 불교를 하나의 거대한 불교 체계로 완성하려는 종합화 시도를 한다. 아직은 완전한 문화를 거치지 못한 상태에서 종합화가 되어 문제가 생겼다. 천태종이 종합화에 좀 더 높은 무게를 두는 것은 수나라의 통일로 세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시대적인 요청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천태종의 삼제원융, 회삼귀일, 일년삼천 같은 개념이 당시의 시대적인 요청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의 철학 체계는 불교의 진리관에 입각해서 볼때 개별적인 차별일나느 것은 실제로는 운융일 뿐이라는 의미로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잘 부합한다. 즉 천태종은 3지역의 공통분모인 불교를 통해서 하나의 세계 제국에 대한 이론적 토대와 이에 따른 원융 놀리를 이룩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 천태종은 당시 중국 불교의 취약점인 수행에 관해서도 지관법이라는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도 불교 수행법은 더운 기후에 특화된 관법으로 중국문화권을 추운 기후에는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중국 문화권 수행의 특징은 추운 기후에서 흔히 나타내는 열을 내는 방식과 집중 그리고 행동주의적인 측면을 가진다. 천태종 역시 집중을 통한 지관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천태종은 중국 무속에 해당하는 도교의 관점을 상당수 차용하여 민중적인 지지를 이끌어 내려고 햇다. 이러한 다양한 가치를 효율적으로 정리해서 운용하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노력이 완성되기도 전에 수나라가 37년의 단명 왕조로 끝나게 된다. 수나라의 단면은 과도한 세금징수지만 천태종의 불완전성도 한 몫했다. 융합이라는 관점에 지나치게 치중한 나머지 역차별에 소홀했다는 것이다. 즉 융합은 차별의 논리와 함께 병진되다가 원융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과 관련해서 천태종은 미흡했고 또 인지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태종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다. 

 

진시황와 수양제가 없다면 오늘날 거대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많은 사는 지역인 동시에 가장 오랜 문명의 지역이 하나의 거대한 단일 집단으로 유전하는 것은 중국이 유일하다. 이 틀의 완성이 바로 진시황과 수양제이다. 이들의 단명왕조라는 공통점 속에서 다음의 존재하게 되는 한과 당이라는 번성 완조의 밑거름이 되면서 모든 악덕을 안게 된다.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만리장성과 대운하와 과거제는 오늘날까지 중국을 나타내는 가장 큰 상징이자 세계 문영에 영향을 끼친 유력한 제도이다. 

 

<당나라와 화엄종>

 

 오랜 분열을 통일한 왕조는 다시 재분열하여 하고 다음에 들어서는 왕조는 번성한다. 이는 역사의 공식이고 이런 공식을 만드는 것이 바로 상업자본이다. 수나라의 대운하 건설을 완성하고 멸망했다는 것은 당나라에서 이익을 본다는 뜻이다. 당나라의 번영은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로 상징되지만 실제로 여기에는 측천무후로 알려진 신성황제의 역할이 있어야 한다. 유일한 여성황제지만 중국의 여성 폄하적인 관점에서 그 업적을 고종이나 현종에게 뺏기게 된다. 

 

당태종의 대외 정벌과 왕권강화의 노력과 발맞춘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다. 현장의 법상종은 오성각별설을 주장하는데 이는 인도의 신분제 사회에서 기인하는 차별적인 질서 원리이다. 이를 통해 세운 왕조는 권위를 수립하게 되면서 왕조의 안정을 꾀하게 된다. 현장의 기행문(대당서역기)는 당태종의 요청에 읳서 제작된 것으로 당의 서역 정벌과 세계 경략에 중요한 지침이 된다. 당태종은 대외 정벌을 통해 왕권 강화하고 반대 세력을 정리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하지만 수나라의 지배 이념인 천태종을 사용할 수는 없게 되어 다시 불교 안에서 찾게 되는게 그것이 원융의 세계관을 가지는 화엄종이다. 

 

화엄종은 원융적인 세계관을 중시한다. 덕분에 수행론에서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 이는 후일 선종이 대두하게 되는 이유가 된다. 천태종은 세계관과 수행론을 아우르려고 했다면 화엄종과 선종을 이를 각각 나누어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화엄종의 원융관은 진리의 평등과 붓다의 평등이라는 이중적인 관점으로 구성된다. 화엄경이 법신이라는 진리의 인격화된 가치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양자는 이중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진리의 평등이란 진리적인 관점에서 일체는 모두 다른 차별상 속에서도 완전함을 갖추고 있다는 원리이다. 또 붓다의 평등은 각기 다른 그 자체가 본래 붓다라는 유기체적인 관점이다. 즉 객관과 주관의 양자 속에서 모든 가치의 다름을 인정하는 완성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서 전체 완성을 현시하는 것이 화엄의 원융관인 것이다. 이는 모든것을 하나로 균일화하려는 평등이 아니라 모든 차별을 인정하는 개별성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치 가을 상의 단풍이라는 것이 실은 모든 나뭇잎들의 부조화일뿐이지만 이러한 부조화가 모여서 거대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모든 단풍이 같은 빛깔이라면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을 것이다. 단풍속에서는 도저히 균질화될수 없는 다양한 색의 향연이 존재한다. 특정 기준을 세우지 않고 그 자체를 모두 인정하는 것이 바로 단풍의 아름다움이고 화엄은 이것을 말한다. 즉 모든 존재는 비교할 수 없는 자체적인 완결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전체는 또다시 통체로서의 완성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속에서 중국의 3지역과 새롭게 현입된 모든 지역과 문화들은 그들만의 차이점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체적인 완성을 이룩하게 된다. 화엄사상은 이를 화엄경이라는 경전을 통해서 좀 더 체계화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3국의 통일을 했을때 통일신라에서도 원효와 의상의 화엄사상이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원융은 당시로서는 이상적인 걳이지 완전한 원융을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신라라는 통일의 주체와 고구려와 백제라는 망국의 편입대상은 결코 평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융은 100년 뒤 완전한 자신감이 생긴 이후에 불국사의 건립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 불국사 즉 뭇다의 나라에서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각기 다른 차이 속에서도 차별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불국사 역시 사상적인 틀안에허 화엄과 관련되어 이룩된 것이다. 

 

* 순자- 화엄- 성리

  맹자- 선종 - 양명

  화엄-선종-성리-양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