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25(중국). 인도에 대한 동경과 구법 여행
<인도에 대한 동격과 구법 여행>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승려들 역시 계속 중국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는 필연적으로 중국불교가 인도불교에 비해 부분적이며 제한적이라는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중국 승려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릎쓰고라도 인도행을 감행하게 하는 이유라고 하겠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료에 따르면 2세기 중반에서 8세기 까지 인도로 향항 구법승은 총 131명이며, 이 중 한반도의 승려는 혜초를 포함한 11명이다. 중국에서 불교가 자리를 잡아가던 초기에는 교단이 안정된지 않았기 때문에 승려들 역시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국불교가 점차 발전하고 안정되면서 인도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이유는 첫째,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부족한 원전자료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으며, 둘째는 붓다와 관련된 유적을 답사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중국의 구법승중 단연 최고인 현장 역시 자은전 권1에서 자신의 인도 순례 목적으로 천제와 도수 참배, 즉 8대 정시 중 상카시아와 부다가야 참배를 꼽았으며, 이와 더불어 유가사지론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중국 최초의 구법승, 주사행>
중국불교의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구법승은 260년에 서역 행을 감행한 주사행(203-282)이다. 주사행이 서역으로 간 것은 당시 유행하던 도행반아경의 불충분한 내용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서역남로를 통해서 호탄(우전)에 도착한 그는 대품반야경을 입수하여 숙원을 풀게 된다. 그러나 이미 고령이었던 주사행은 282년 제자인 불여단등 10인에게 대품반야겨을 중국의 낙양으로 가져가게 한 뒤, 자신은 호탄에 남아 70세로 입적하였다. 이때 보낸 경전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2년 후인 284년이라고 하였다. 출삼장기집 권7에 따르면, 이 대품반야경은 291년 축숙란 등에 의해서 방광반야경이라는 이름으로 한역된다. 주사행이 서역으로 떠난 것인 260년이고, 불여단등에서 대품반야경을 가져가도록 한 것이 282년임을 보면 호탄에 도착해서 경울 구하고 원문을 베껴 쓰는 데 걸린 세월이 무려 20여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사이에 죽음을 불사하는 희생과 종교적인 구도심 및 열정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주사행이 도착한 곳은 인도까지의 여정 중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호탄이었다. 그러므로 주사행이 최초뢰 인도에 간 중국인 승려라고는 할 수 없다.
<법현의 간절한 구법과 혜생>
본격적인 인도 구법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흔히 불국기로 알려져 있는 고승법현전의 저자 법현이다. 율장이 부족하여 승단 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음을 우려한 법현은 인도를 방문하여 율장을 구해 오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399년, 60여세애 달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5인과 더불어 서역남로를 따라 인도행을 감행한다. 인도에 도착한 일행은 인도를 순례하고 율장과 여러 경전들을 베껴 쓴 뒤 스리랑카로 건너갔다가 남해항로인 해로를 타고 414년 중국 광동성 광주로 돌아온다. 법현은 15년에 걸쳐 30여국을 다녔는데, 이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불타발타라와 함께 마하승기율을 번역하는 등 경전 번역에 매진하였다. 법현이후 기록에 남아 있는 구법승은 혜생, 법력이다. 양현지의 낙양가름기 권5에는 이들이 517년 북위 호태후의 명으로 책임자인 송운과 함께 낙양을 출발해 서역으로 향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타고 서북인도릐 간다라 지방으로 갔다가 대승경전 170부를 구해 522년 귀국하게 된다. 혜생은 이후 사석역기를 찬술하였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낙약가람기 권5의 상당 부분은 이 사서역기를 옮겨 적은 기록으로 추측된다. 이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 인도에 대한 열망이 비단 승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를 믿던 귀족을 비롯한 국가적인 것임었음을 확인해 볼 수 가 있다.
<육지와 바다로 오간 현장과 의정>
중국 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구법승은 단연 현장(602~664)라고 할 수 있다. 현장은 629년 중국을 출발해서 645년 까지 총 16년간 110개국을 유력했다. 그리고 귀국하면서 657종, 520상자의 경전을 가지고 왔다. 귀국 후 당태종은 현장에게 서역과 인도에 대한 정보가 담긴 기행문을 요청하는데, 이렇게 해서 64년에 작성된 것이 대당서역기 12권이다. 대당서역기에는 현장이 직접 답사한 110개국과 간전적으로 들은 28개국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책은 현장의 전기인 자은전 10권과 더불어 7세기 실크로드의 문화와 인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현장은 갈 때 천산남로를 택했고 올때는 서역남로를 이용하는 등 모두 육료를 사용했다. 이는 법현이 육로로 출발하여 해로로 귀국한 것, 현장 이후 인동에 다녀온 의정이 가고 오는 것 모두 해로로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 덕분에 현장의 기행문에는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내용이 수록될 수 있었고, 이는 이후 당나라가 중앙아시아 교역로의 패권을 장악하면서 세계제국으로 급성장하게 되는 동인이 되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다양한 답사 지역과 국가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고 종교,문화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1254~1324)의 동방견문록, 이븐 바투타(1304~1368)의 여행기와 더불어 세계 3대 여행기로 꼽힌다. 또 우리나라 혜초(704~787)의 왕오천축국전, 일본 엔닌(78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동아시아 3대 기행문으로 일컫어지기도 한다. 현장의 여장이 중국에 미친 영향이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현장은 생전부터 신격화되었다. 이후 명대 오승은은 현장의 여정을 서유리고 재탄생시키기도 한다. 서유기에 등장하는 오공, 오능(저), 오정은 현장이 고창국에서 받은 제자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실존인물들을 소설화된 것이다.
중국 구법승중에 현장 다음가는 인물로 의정(635~713)이 있다. 의정은 36세 때인 671년 과동성 광주를 출발하여 해로로 인도 행을 감행한다. 의정이 인도로 향한 이유는 동진 때의 승려 법현과 마찬가지로 율장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중국을 떠난 의정은 24년간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해상 실크로드 지역을 유력하다가 695년 다시 해로를 통해서 400부의 경전을 가지고 낙양으로 돌아온다. 의정은 이후 장안의 천복사를 중심으로 근본설일체유부비니야와 근번설일체유부비니야약사등 총 56부 230권의 경전을 번역하였다. 의정의 번역은 주로 설일체유부 율장과 관련된 것이었는데, 현재 북방불교에 전하는 다섯종의 한역 율장 중 유부율이 의정에 의해서 갖춰졌다.
또 의정은 자신의 기행문을 남해기귀내법전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남겼다. 이 기록은 7세기 후반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종교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의정이 취합한 61명에 댈하는 인도구법승의 이름과 전기가 수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신라 승려가 8명이 속해 있어 신라의 구법 열정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여기에는 당시 인도로 간 승려들이 인도의 높은 문화 속에서 계속 공부하려고 했으며, 험난한 여정 때문에 다시 올 엄두를 못 내는 내용들도 기록되어 있다.
율장명 | 번역자 및 번역 연대 | 성립연대 | 사용 부파 |
사분율 60권 | 불타야사, 축불염(410~412) | BC 100-1 | 담무덕부, 법장부 |
오분율 30권 | 불타집, 축도생 등 (424) | BC 100-1 | 미사색부, 화지부 |
십송율 61권 | 불야다라, 구마라집(404) | 1-100 | 살바다부, 설일체유부 |
마하승기율 40권 | 불타발타라, 법현(410) | 100-200 | 마하승가부, 대중부 |
유부율 157권 | 의정(635~713) | 300-400 | 설일체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