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불교사(자현 외)

불교사 8(인도). 대승불교 등장 1 - 문자화, 이타생, 신격화(상징물)

선묘(善妙) 2025. 3. 7. 11:20

<구술과 암기를 통한 전승에서 기록을 통한 전승으로>
 
인도는 일찍 부터 문자가 발달해 있었다. 인더스 문명에서 사용하던 문자는 표본이 부족해서 아직 해독을 못하지만, 그것이 문자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렇게 일찍이 부터 문자가 발달해 있었음에도 인도인들은 기록보다는 암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성스러운 지식이 외부에 유출될 우려가 있고, 악의적으로 잘못 사용된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은 불교에도 영향을 미쳤다. 붓다의 제자들은 성문(들은 사람)이라하는 것도 구술과 암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기의 구슬과 암기를 통한 전승은 물병의 물을 다른 병으로 옮겨 담듯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러나 불교가 점점 발전하고, 시대가 변화됨에 따라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설명 가운데 일부는 암기의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암기할 양이 점차 늘어난다. 또 일부 사람들은 본문과 설명을 혼동한 채 암기하는 문제도 발생하기 이른다. 이렇다 보니 기원전후가 되면 암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암기 대상의 총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서 경전의 문자화, 즉 성문화가 이루어진다. 
 
<문자화된 경전이 초래한 재가인의 자각>
 
스리랑카 마탈레에 위치한 알루비하라 사원에서 불교 경전이 최초로 문자화 되었다. 그 시절 인도에서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문자화 하는 데 대한 반발이 강했고, 스리랑카는 상대적으로 인도보다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있었기 떄문이다. 그러나 한번 문자화가 되자 암기와는 비교되 되지 않는 편리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구전에서 기록으로 불교의 가르침의 전승 양상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가르침이 문자화 되었다는 것은 이제 불교 지식의 전달자가 반드시 승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에서 암기 문화가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이유는 지식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의 명백한 구분이 가능하며, 이런 경우 스님의 권위가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록되기 시작하면 스승의 권위나 승단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추락하게 된다. 즉 누가 많이 암기하고 있으냐에서 누가 많이 이해하느냐로 그 중심이 옮겨 지는 것이다. 또한 반드시 승려가 아니더라도 현대의 불교학자처럼 재가인들도 불교 공부를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다. 경전의 문자화는 주류, 비주류, 그리고 출가인, 재가인의 편차를 줄이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는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가 성립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된다. 
 
<동시대에 함께 등장하는 대승 불교>
 
대승불교가 특정 부파 불교를 지칭하기 보다는 기원전후 성문화된 경전에 입각해서 일어난 종교개혁이자 민중 불교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비슷한 시기에 중인도에서는 법화경과 유마경, 남인도에서는 반야경과 화엄경, 서북인도에서는 정토 경전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인도에 걸쳐 다양한 사상과 신앙 형태가 동시에 출몰하는 것이다. 이는 대승불교가 하나의 흐름으로 발전하였다가 분화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흐름이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사상이나 신앙적으로 공통분모는 다소 적지만, 여기에서 재가인의 각성을 가능하게 한 가르침의 문자화의 코드가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전의 탄생 즉 성문화야말로 대승불교 종파의 공통분모라고 볼 수 있다. 
 
<대승불교 발생의 한 가지 설, 대승 잠복설>
 
대승불교가 추구한 것은 부파불교와 같은 어려운 불교가 아닌 쉬운 불교 였다. 부파 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학문과 수행에 몰두하는 불교였다. 그것 역시 나름의 존재 의의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사회적인 요구와 신도들의 바람에 응하기에는 불충분한 면이 있다. 붓다 당시에는 수행자나 제자들보다도 더 많은 민중을 만났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붓다 당시 불교는 기존의 사상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고, 그래서 이를 널리 펼치기 위해서는 민중의 지지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붓다가 이 민중과의 만남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결국 불교가 성립하고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승려들은 자신의 깨달음에 집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민중의 아픔과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집과정에서 국왕이나 귀족과 한 의미있는 대화 이외에 민중과 만난 기록들이 모두 사라지고 남아 있지 않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붓다가 민중을 만나서 아픔을 감싸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붓다가 교화한 지역에서 수백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서 전설처럼 맴돌고 있었다. 이것이 붓다의 정신은 쉬운 불교이자 현실적이고 실생활에 도움이되는 불교였다는 자각을 환기시키게 된다. 이것을 대승잠복설이라고 한다. 즉 대승불교는 기원전후에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붓다 당시부터 전해지던 전설이 구심점이 되어서 가르침의 문자화라는 과정을 거쳐 부파 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응집되었다는 것이다. 
 
<아라한을 비판하는 보살주의>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자기 공부와 수행에만 매몰된 형태를 비판하면서 제기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는 이타행을 중심에 두면서 불교의 본래 정신에 부합한다고 여기며 이상적인 인물로 보살이라는 제시를 하게 된다. 보살이란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부파 불교의 이상 인격인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를 끊어버린 아라한과는 다른 개념이 된다. 보살은 본래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의 석가모니를 가르키는 칭호였다. 이름을 부르기에는 그렇고, 그렇다고 붓다라고 칭하는 것은 그렇고 해서 붓다의 전기 자료에서는 반드시 붓다가 될 분이라는 의미로 보살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게 된다. 대승불교에서 붓다가 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바로 보살이라고 부른다. 대승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은 크게 재가 보살과 출가 보살로 구분된다. 재가 보살이란 재가인으로서 최고의 경지인 보살에 오른 분으로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같은 분들이 여기에 속한다. 반면 출가보살은 출가한 승려들 중에 보살이 된 분들로 문수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등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대승 불교는 재가인 뿐만 아니라 출가인 중에도 붓다의 근본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이자 이타운동이였던 것이다. 
 
<교조 붓다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찬불승의 등장>
 
찬불승은 붓다의 생애를 찬양하는 찬탄문을 가지고 일종의 거리 공연을 하는 공연자들을 가르키는 표현이다. 붓다의 생애를 대본으로 하는 판소리 공연이라고 생각하면 쉽겠다. 인도 암기 문화 전통에는 게송속에는 나름의 운율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찬불승이 발생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대승불교에서는 붓다와 붓다가 되기 위한 노력이 핵심을 이룬다. 이런 점에서 붓다의 생애인 불전을 정리하는 일이 늘어나고 붓다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음유시인들의 대중문화운동이 이뤄지게 된다. 이 음유시인들이 바로 찬불승으로 불교 최초의 전문 포교사라고 할 수 있겠다.  찬불승의 발달은 붓다의 생애가 종교적인 관점에서 재정리하는 계기가 된다. 불교는 붓다를 교조로 하는 종교이지만 교조보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수행문화 때문에 붓다의 생애를 파악하는데 미진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가 되면 이 부분이 정리된다. 이를 통해 불교는 붓다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적인 영역을 확립하게 되는데, 대승불교의 신앙적인 측면은 찬불승과 무관하지 않다. 찬불승이 만나는 대상은 일반 민중이었기 때문에 불교의 외연은 확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붓다의 생애가 윤색되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찬불승과 관련된 대표 인물이 바로 100~160년 경의 마명이다. 마명의 대본은 5권으로 불소행찬(5권), 불본행경(7권)으로 전해진다. 이외에도 백오십찬불송도 있다. 

대승불교의 흥기

 
<신앙지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불탑>
 
탑은 붓다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기원전후까지 대다수 인도탑은 아소카 왕이 8만 4천탑의 건립과 관련된 붓다의 사리를 모신 불탑이었다. 특히 붓다는 불탑을 번화가게 건립하라고 유훈하였고, 그 관리 주체는 신도로 지목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비구들이 거주하는 사원과, 사리를 모신 공간으로서의 탑이라는 이중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빋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승려를 찾아서 가르침을 받는 것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동시에 붓다를 그리워하고 추모하면서 불탑을 찾아 기도하고 신앙을 발현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파불교의 승려들이 어려운 교리에 매몰되자 사원을 찾기 찾기 보다는 자유롭게 불탑을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불탑은 붓다를 기리는 성지가 될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가르침을 전해주지는 못하였다. 이 아쉬움을 불탑의 관리자들 중 일부가 불탑 참배자들을 대상으로 붓다의 생애를 설명해 주는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 일종의 문화해설사 겸 종교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의해서 붓다의 생애가 점차 정리되고 불탑 관리자 역할이 찬불승으로 확대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는 불교가 점차 종교화되고 붓다에 집중하게 되면서, 찬불승과 불탐에서 붓다의 생애에 대한 설명으로 발전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불탑을 통해 붓다를 설명하는 사람들>
 
불탑에서 붓다의 생애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성지 순례하는 승려들이 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승려가 아닌 재가자로서는 붓다의 생애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붓다의 생애를 전문적으로 구술할 수 있는 담당자겸 불탑관리자가 존재하게 되면서 붓다의 생애는 보다 신앙적이고 극적으로 윤색하게 된다. 즉 듣는 사람을 위해 극적인 구성과 전개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까지 전해지는 붓다의 생애 역시 인과관계가 뚜렷한 극적인 전개가 보이고 있는 점 역시 이와 같은 영향이다. 또한 붓다의 생애와는 무관하지만 교훈이 되는 내용들은 본생담이라는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활용하기도 한다. 본생담은 붓다 당시 부터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는 인도인들이 인과관계가 불투명한 사건에 대해서는 전생 이야기를 빌어서 설명하는 문화 전통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본생담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은 붓다의 생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는 것과 관계가 없지는 않다. 또 본생담은 후에 불교가 발전하지만, 붓다 당대에는 붓다의 교화가 미친 적이 없는 지역에서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활용되기도 한다. 이는 서북인도에서 본생담이 발달한 예를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불상의 탄생에 얽힌 전설>
 
불탑은 붓다의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이점은 붓다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갈증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해 주는 것이 불상이다. 불상의 탄생과 관련된 것은 증일아함 권 28 청법품에서 볼 수 있다. 붓다가 3개월간 도리천에 계신 어머니 마야 부인을 위해서 가르침을 설해 주러 가신 사건과 연관되어 기록하고 있다. 이때 붓다를 그리워한 구섬미국의 우전왕이 전단향나무로 불상을 만들고, 코살라의 파사익왕은 자마금으로 불상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불상 제작의 당위성을 변증하려는 종교적인 이야기일 뿐, 실제로는 기원전후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과 인도내륙의 마투라 지역에서 불상이 제작된다. 이렇게 붓다 입멸 후 불상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이전 500년간은 불상이 없던 시대, 무불상시대라고 한다.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
 
인도에서 신이나 제사장을 상으로 만든 것은 인더스 문명에서 부터 확인된다. 이와 같은 전통은 이후 브라만교의 다양한 신상들을 제작하는데 발휘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완전한 진리는 형상으로 만들수 없다는 생각을 하였고, 붓다는 최후의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을 통해서 진리와 하나가 된 분이기 때문에 역시 형상으로 만들수 없다고 생각했다. 교리상 불상이 제작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알렉산더 동방 원정에 의해 그리문화의 영향권으로 들어간 간다라 지역이 점차 불교를 믿게 되면서 새로운 기류의 발생으로 제우스나 헤라클라스와 같은 신상을 만드는 것 처럼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간다라 지방이 불교의 주류 지역으로 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불교에 대한 이해 부족과 선행된 문화 관념이 만나면서 불상이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간다라 불상은 문화의 교류가 로 맺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간다라 불상(대영박물관 2017. 01. 방문) 큐샨제국 시절 만듦

 

 
 
 
<보살상에서 시작된 마투라 불상>
 
마투라 지역의 불상은 간다라 지역과는 달느 양상으로 시작되는데, 간다라 불상은 처음부터 붓다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면(불상을 만드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마투라 불상은 처음에는 보살상에서 시작된다. 내륙에 위치한 미투라는 이미 불교가 전래되어 어느 정도 발전해 있었기 때문에 불상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투라의 불상 제작자들은 붓다가 되기 전, 보살의 모습에서 실마리를 얻었고, 붓다는 완전하기 떄문에 불상으로 만들수 없었지만 깨달음을 얻기 전의 보살의 모습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붓다의 생애가 정리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불상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간다라 불상과 마투라 불상 중 어느 지역이 먼저인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간다라와 마투라 두 지여의 불상은 붓다에 대한 관심과 생애에 대한 정리라는 동일한 배경을 가지고 있고, 각기 다른 관점에서 만들어졌으며, 같은 시기, 인도 각지에서 일어난 대승불교가 다른 사상을 말하는 것 처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렇기 떄문에 같은 배경을 가진 두 지역의 불상 역히 전혀 다른 표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시대적인 요청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서로 다른 문화 배경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마투라 보살상
마투라 입불상

 

간다라 불상과 마루타 불상의 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