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심우도(근원을 찾아떠나는 구도여행)(오쇼)

제2 견적 見跡: 소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선묘(善妙) 2024. 10. 20. 10:42

 

게송

 

망망발초거추심 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 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 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 但聞楓樹晩蟬吟

 

물가의 나무 아래에서 드디어 발자국을 발견했다.

방초를 헤치고서 그의 자취를 보았다. 

설령 깊은 산속에 있다 해도

하늘을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길 수 있으리오.

 
서문(주해)

 

경전에 의해 그 뜻을 알고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본다.

온갖 기물이 똑같은 쇠로 만들어졌듯이

우주 만물이 자기라는 사실을 배운다.

정사를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아직 문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일시적으로 발자국을 보았다.

 
마음이 떨어져 나갔다. 마음이 아무리 멈추라고 속삭여도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이 떨어져 나간다. 마음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나는 탐구를 계속 하겠다. 지쳤다면 너는 그만 두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계속 구도의 길을 가겠다."

 

마음이 잠시동안 더 그대에게 매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유혹을 무시하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한다면, 오로지 '소'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면 틀림없이 발자국을 발견할 것이다. 발자국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다만 그대가 온갖 사념으로 소란스러워서 그 발자국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마음속에 자욱한 먼지가 일어서 그 미묘한 발자국을 보지 못한 것이다. 

 

물가의 나무 아래에서 드디어 발자국을 발견했다.

방초를 헤치고서....

 

앞에서 나는 우거진 숲이 욕망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이젠 그 욕망의 숲에서도 소의 발자국을 찾았다. 욕망 속에 숨어 있는 신을 발견했다. 그대는 세속적인 것들 속에서도 초월적인 것을 보기 시작한다.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구하고 있는 것일까? 만일 그가 돈을 구하는 것이라면 어느 지점에서 그가 만족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그런 순간을 결코 오지 않는다. 그는 무엇인가 다른 것을 찾고 있다. 길을 잘못 들어 돈에 미쳐 있지만 그가 실제로 구하는 것은 돈이 아닌 다른 것이다. 그는 부자가 되길 원한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 보자. 돈에 미쳐있는 사람은 풍족해지길 원한다. 하지만 그는 풍족해진다는 것이 돈을 모으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풍족해진다는 것은 삶이 주는 모든 경험을 맛보는 것을 의미한다. 풍족해진다는 것은 무지개가 된다는 것이다. 흑백이 아니라 온갖 색채가 공존하는 것이다. 풍족해진다는 것은 더 성숙하고 깨어 있으며,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실제로 다른 것을 구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다.

(석사 논문 주제 색채, 자연색, 괴테 선택한 이유)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실제로 무엇을 추구하는 것일까? 그는 신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이 세상에는 권력이 있으면 신처럼 행세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을 추구하는 이면에는 신에 대한 추구가 숨어있다. 그런 까닭에 권력을 얻었을 때 돌연 그는 내적으로 무능함을 느낀다. 외적으로는 풍족하지만 내적으로는 거지처럼 빈곤하다.

 

방초를 헤치고서 그의 자취를 보았다. 

설령 깊은 산속에 있다 해도

하늘을 향한 그 코를 어찌 숨길 수 있으리오.

 

이때 그는 놀라게 된다.

"이 발자국을 보지 못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가? 바로 내 앞에 발자국이 있다!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내 얼굴에 코가 달려 있는 것처럼"

그러나 눈을 감고 있거나 흐릿하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늦은 밤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여러 갈래 길에서 완전히 길을 잃게 되었다. 그가 물었다. "아틀란타쪽은 어디입니까, 제 차의 불빛이 아틀란타 가는 길을 비추고 있습니까?, 그러자 여자가 말했다. 후미등이 그 쪽을 비추고 있군요"

이것이 그대가 처한 상황이다 빨리 달릴수록 그대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속도를 높일 수록 혼란이 가중된다. 서서히 그대는 방향 감각을 잃는다. 그저 여기저기로 질주할 뿐이다. 속도 자체가 목적이 된다. 빨리 달리면 마치 어딘가에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속도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노이로제 증상이다. 

 

과학은 모든 것을 빠르게 해치우는 데 매달리고 있다. 우리가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보는 한, 그대의 후미등이 올바른 방향을 비치고 있다. 그대는 이미 어딘가에서 집을 지나쳐 왔다. 그대 존재의 근원 어딘가에 그대의 집이 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그대가 무엇을 하든 간에 집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하는 모든 행위는 몽유병 환자가 어슬렁거리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그대를 안다. 그대는 멀리 도망갈 수가 없다. 사실 그대는 달리는 꿈을 꾸고 있을 뿐이다. 어딘가 목적지로 가고 있는 꿈을 꾸고 있음에 불과하다. 그대는 깊이 잠들어 있다. 모든 것이 실제가 아니라 그대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선에서는 준비된 사람은 즉각 깨달음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멀리 달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진짜로 멀리 달려간 것이라면 돌발적인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달려간 만큼 다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벗아난 거리만큼 돌아와야 한다.  

 

그대는 수많은 생 동안 여행해 왔다. 만일 그 거리만큼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깨달음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깨달음이 점진적인 것이라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다. 선에서는 깨달음이 돌발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깊이 잠든 사람이 달에 가는 꿈을 꾸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어디에 있겠는가? 달 위에? 그는 이 지구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꿈이 깨는 것과 동시에 달 또한 사라질 것이다

 
이제 첫번째 게송에 대한 주해를 보자
 
 

본래 잃지 않았는데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참된 본성을 등진 까닭에

소를 찾지 못한 것 뿐이다.

감각이 혼미한 가운데 그의 발자취를 잃었으니

집은 점점 멀어지고 수많은 갈림길에서

어느 길이 옳은지 분간할 수 없다. 

탐욕과 두려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어지럽게 일어나네.

 


그대는 소를 잃은 적이 없다. 
소는 바로 그대 자신이기 때문이다. 소는 그대의 에너지이며 삶 자체다. 소는 그대를 살아 있게 만드는 역동적인 원리다. 결코 소를 잃은 적이 없다. 그러나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이해하면 찾을 필요가 없다. 이 이해만으로 충분한다. 그러나 그대 안에 이런 이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찾을 필요가 있다.

 

찾은 행위는 그대를 목적지로 이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목적지를 잃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찾는 행위는 다만 탐욕과 두려움, 소유욕, 질투, 증오심, 분노를 버리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구도 행각은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장애물만 제거되면 그대는 홀연히 깨우친다.

 

"나는 항상 이 곳에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간 적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탐구는 어떤 면에서 소극적(negative)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대리석에서 조각품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이 조각가는 무엇을 하는가? 불필요한 부분을 쪼아 낼 뿐이다. 그러면 서서히 형상이 나타난다. 예수 상을 만들고 있는 미켈란젤로에게 누군가 말했다. "이 작품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대리석 안에 숨어 계셨고, 나는 그저 그분이 풀려나도록 도와 드렸을 뿐입니다. 그 분은 이미 거기에 계셨습니다. 다만 필요 이상의 대리석이 붙어 있었지요 그래서 내가 그 불필요한 부분들을 쪼아냈습니다. 나는 그 분을 발견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 대리석은 건축가들이 버린 것이다. 건축중인 교회 주변을 돌아다니나가 미켈란젤로가 건축가에게 물었다.

 

"왜 이 대리석 덩어리를 버렸습니까?"

"필요없어서요."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그 대리석을 주워왔고, 이 돌덩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수 상이 탄생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돌덩이 옆을 지나가는데 예수님이 나를 부르더군요 그 분이 돌 안에 숨어서 '미켈란젤로여, 와서 나를 해방시켜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소극적인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소는 이미 거기에 있다. 찾는자가 '찾는 대상'이다. 몇 가지 불필요한 것들이 그대에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구도 행각은 소극적인 것이다. 그 불필요한 것들을 떼어 내기만 하면 완전한 영광 속에 존재하는 그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두 번째 게송에 대한 주해를 보자
 
 
 

경전에 의해 그 뜻을 알고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본다.

온갖 기물이 똑같은 쇠로 만들어졌듯이

우주 만물이 자기라는 사실을 배운다.

정사를 가려내지 못한다면

어찌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으리오

아직 문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일시적으로 발자국을 보았다.

 

'가르침을 이해함으로써 소의 발자국을 본다...' 수많은 붓다들이 이 지상에 존재했지만 그들 모두 똑같은 것을 가르쳤다. 다른 것을 가르칠 수가 없다. 표현은 무수하지만 진리는 하나다. 그들 모두가 하나의 진리에 대해 말했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소 발자국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이해하기보다는 무작정 추종함으로써 소 발자국을 놓친다.

 

추종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는 심오한 깊이를 갖는다. 이해할 때 그대는 불교도가 아니라 붓다가 된다. 이해할 때 그대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된다. 추종은 그대를 기독교인으로 만들지만 이해는 그대를 그리스도로 만든다. 여기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추종은 앞에서 말한 '판단공포증'이다. 추종한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이제 나는 맹목적으로 당신을 따르겠다.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당신이 가는 곳이면 무작정 따라가겠다."

이에 반해 이해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당신이 하는 모든 말이 귀기울여 듣고 명상하겠다. 그리고 내 안에서 당신의 이해와 일치하는 이해가 생겨나면 나는 내가 이해한 바를 따르겠다."

선생들은 도움이 된다. 그들은 길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매달리지 말라. 추종은 집착이다.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추종자가 된 사람은 길을 잃는다. 일단 추종자가 되면 한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대는 더이상 아무것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유신론자가 되어서 "신은 존재한다. 나는 신을 믿는다."고 말할 것이다. 또는 무신론자가 되어서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나는 무신론자이며 공산주의자다."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두 경우 모두 그 대는 특정한 이념을 따르는 것이다. 그대는 어떤 이념과 도그마에 몸을 담았다. 무리와 군중 속에 묻힌 것이다.

(8장의 내용이 이 차이였구나.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 집착, 이념에 사로잡힌자,,, 와의 충돌)

 

구도의 길은 철저하게 개인적인 것이며 위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대는 홀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구도의 아름다움이다. 깊은 홀로 있음, 조금의 사념도 일어나지 않는 홀로 있음을 통해서만 신이 그대 안으로 들어온다. 신이 그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깊은 홀로 있음 안에서는 지성의 불꽃이 환한 빛을 발한다. 침묵과 지복이 그대를 감싼다. 홀로 있음 안에서 그대 눈이 뜨인다. 그대의 존재가 열린다. 구도의 길은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그대들 모두를 개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대는 군중의 일부가 되고 싶을 것이다. 눈먼 장님처럼 무작정 따라가는 것은 아주 편하고 안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를 장님으로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내게 매달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대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대가 내게 가까이 오는 것은 허용하되 내게 매달리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대에게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온갖 가능성은 허용하지만 나를 믿는 것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미묘하지만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항상 깨어 있으라. 그대의 마음은 내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대가 "나는 당신에게 귀의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대의 귀의는 신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판단공포증과 두려움에서 나온 귀의이다. 홀로 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그대의 여행을 편하고 안락하게 만들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편하고 쉬운 길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험하고 어려운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선객들이 사토리라고 부르는 마지막 순간에는 나마저 그대 곁에 없을 것이다. 그대와 나는 문 앞까지만 같이 여행한다. 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그대 혼자 들어가야 한다. 

 

그러므로 구도의 전 과정에서 나는 그대에게 홀로 있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어야 한다. 나는 그대가 두려움을 떨치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다. 삶을 신뢰하라. 그 외에는 다른 신뢰가 필요 없다. 삶을 신뢰하라. 그러면 삶은 자연스럽게 그대를 궁극의 진리, 신 또는 그대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궁극의 그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삶의 강은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삶을 신뢰할 때 그대는 강을 따라 흘러간다. 그대는 이미 강 속에 있다. 그런데 그대는 강둑의 죽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있거나, 또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싸운다. 경전과 이념, 특정한 도그마에 매달려 있으면 삶의 강이 그대를 데려갈 수 없다. 모든 이념을 버려라. 경전과 도그마를 버려라. 삶이 유일한 경전이다. 삶이 단 하나의 성경이다. 삶을 신뢰하라. 삶의 강물이 그대를 궁극의 바다로 데려가도록 허용하라. 

 
오늘은 이만..
 

 

곽암의 견적